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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긴 끄적임)

ITF 번외편 ㅡ 제 3차 안산논권 과 그 후 반성

by Aner병문


0. 나의 현주소



스무살 택견으로 시작하여 마흔한살 ITF태권도에 이르기까지 햇수로만 21년, 다양한 무공을 익혀왔다. 군대에서조차 불침번 때 다리찢기 각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돈 한 푼 없을때에도 병충방제를 위해 짚더미 감은 나무를 맨주먹으로 두드리며 권투 연습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아내 왈, 나무에게 매우 좋지 않은 일이라고 하며, 직접 해본 저도 뼈 다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올바른 무도인이자 환경을 사랑하는 시민은, 이처럼 상식없는 단련을 삼갑시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실력은 객관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인가? 어찌 되었건 한 도장의 부사범으로서 내 스스로를 냉정히 평가해보자면, 기술을 쓰는 법을 알고는 있으나 몸으로 보이기에는 부족하며, 근력과 유연성을 위시한 신체 기능도 떨어지고, 그렇다고 특출난 감각이나 응용력이 좋지도 않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노력하여 3단 띠를 받긴 했으나 평균적인 3단 실력에 걸맞다고 보긴 어렵고, 길거리에서 문외한이 무작정 덤비면 어찌저찌 막을 수 있는 정도라 보면 적합하다. 철없던 시절, 나는 내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상대가 나보다 약하면 힘으로 눌렀고, 빠르고 강하면 다양한 기술을 쓰는 식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타격을 잘하면, 무조건 아래에서 잡아끌어 관절기로 몰아넣었고, 상대가 나를 잡으려고 하면, 팔꿈치와 무릎까지 아낌없이 써가며 타격으로 쳐냈다. 지금까지 큰 상해 사건이 없었던 이유는, 내 타격이 둔하고 약했기 때문일 터이다. 이제는 경기를 치르며 한정된 규칙에서 존중없이 무식하게 싸울 수 없으니, 결국 그 때 쌓아둔 경험만이 겨우 자산으로 남았다. 동일한 조건에서 신체기능과 기술, 감각 모든 것이 떨어지는 40대의 나로서는, 내 몸으로 끊임없이 쌓아둔 경험을 토대로 상대가 뻗는 기술들을 뚫거나 걷어낼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훈련량을 쌓는 나로서는, 차라리 틀이 좀 더 자신이 있었으나, 맞서기는 늘상 둔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이지 맞서기를 철저히 준비했다. 대회 전, 마지막 연습 시간에서 나는 지금까지 가장 안정적으로 맞서기를 했고, 여러 사제사매들도 평소랑 다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 자신감 뿜뿜, 가보자!



1. 믿는도끼 발등찍혔네- 틀 동메달 : 시합 도중 최영 틀을 잊어버리다.



3단 마지막 틀 최영은, 어려운 틀이다. 최영 장군이 누구신가. 불교의 왕국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려던 의기충천의 무인이요, 좋은 예는 아니지만, 무속인들이 모시는 영걸로도 소문 났다. 병권을 거의 다 장악한 백전연마의 이성계가 쳐들어왔을때에도 그 충절은 굽히지 않았고, 억울한 누명으로 목이 잘릴 때에도 황금 보기를 늘 돌같이 했기에 스스로의 마음에 참람됨 있다 하면 무덤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으리라 단언하시었다. 밀어닥치는 조선의 기세와 무너져가는 고려 사이에서 한 삶을 마감하셔서일까? 최영 틀은 바로 직전 유신 틀에 비하면 비교적 짧고, 동작 수도 많지 않지만, 잠깐 사이에 전후좌우로 연달아 발차기를 이어서 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매일매일 틀 연습을 해온 내 스스로의 훈련량을 믿어왔다. 나는 애를 키우느라 잠시 모든 훈련을 놓았던 8개월 무렵을 제외하곤, 도장 안팎을 상관없이 가능한 훈련량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웬걸, 좀처럼 없는 일이 발생했는데, 대회의 틀 종목에서 처음으로 틀 연무선을 잊어버려서 중간에 멈칫거렸다. 틀로 치자면 중반부, 돌려차고, 걸어차고, 뒷차찌른 뒤에 연달아 방향 회전까지도 잘 해놓고, 걷는서 손끝뚫기 할때 갑자기 걷는서기를 헷갈려버렸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나와 한 판 붙으셨던 고려인 도장의 비딸리 사범님은 물론 나와 비견할 수 없을만큼의 고수시지만, 심판 보다 중간에 옷 갈아입고 출전하신데다 최영 틀보다 한 단계 아래인 유신 틀로 맞붙으셨는데, 제아무리 틀의 격이 달라도, 완성도에서 차이가 나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그 동안 내 틀을 너무 자신해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3단쯤 되어서야, 초단 때 영 복잡하고 성가시게 느꼈던 초단 첫번째 광개 틀의 재미와 매력을 알기 시작햇는데, 이번 대회 틀 종목 연무에서 틀도 결코 생각없이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틀은 1회전 탈락..겨우 인원수 맞춰서 동메달은 받앗다...ㅠㅠ



2. 해봐야 우물안 개구리 - 맞서기 은메달 : 깃발 3개를 다 빼앗기고 분패석패 ㅠㅠ 디지게 두드려 맞고 ㅠㅠ



맞서기는 사실 그 동안 비교적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종목이다. 철들기 전, 여러 낱기술을 가지고 못난 짓도 참 많이 하고 다녀서, 사실 굳이 맞서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었다. 내가 맞서기에 본격적으로 열중하기 시작한건, 30대 후반. 부사범 일에 더욱 몰두하게 되면서다. 틀이야 그 동안 해오던 가락이 있으니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맞서기는 또 달랐다. 나는 초단 때 이미 나의 발차기를 보며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유급자 사제사매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라도, 그토록 싫어했던 바BAR를 다시 잡고, 발바닥이 벗겨지도록 발차기 연습을 열심히 했는데, 3단쯤 되어서야 비로소 맞서기의 부끄러움도 깨닫게 되었다. 언제까지 어설픈 주먹질과 발차기를 가지고 대충대충 쌈질하듯 맞서기를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늘상 부사범으로서 유급자들을 상대해오느라 상대방 기술을 느릿하게 받아주고, 느릿하게 되쳐주는 방식도 고쳐야 했다.



마흔을 넘기면서 뒤늦게 나는 맞서기 연습의 비중을 올렸다. 더 늦기 전에 해야 했다. 다른 이들은 스무살 무렵에 맞서기나 겨루기, 대련, 스파링 등에 열을 올리고 나이 먹으며 서서히 그 비중을 줄이는데, 나는 시작 자체가 늦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더는 길거리에서 막싸움질처럼 고집을 부리고 싶지도 않았고, 내 몸을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써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동안 타격과 관절을 가리지 않고 이래저래 해오던 가락이 있어서 격 차이가 많이 나는 초심자들, 유급자들과는 그럭저럭 어울려 드릴 수 있었는데, 보통 상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니, 나는 소위 말하는 사우스포- 즉, 오른손이 앞에 오는 자세로 상대방 공격을 받아들이고, 또 천천히 반격해드리는 방법을 벗어나서 내가 먼저 끊임없이 공격하고 연타하는 자세를 연습하느라 발바닥이 몇 번이고 벗겨졌다. 그래도 대회 출전 전주에 감을 잡게 되어 오전반 우백호, 장 선생님, 겨루기 선수 출신 퓔, 열혈 부사범님 등과 여러번 연습하며, 정말이지 틀까지 포기할 정도로 최적의 맞서기 실력으로 임했다는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웬걸, 역시 실전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상대는 형님뻘이신 거창도장의 초단 수련자셨는데, 본인 스스로도 말씀하시길 팔이 길다셨다. 사실 변명밖에 안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 팔을 걷어내고 유효타를 맞히기 까지 나는 보통 서너 대는 맞아야 겨우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왼손이 앞으로 오는 오소독스 자세에서 자꾸 상대방의 허리쪽을 걷어차는 실수를 해서 두번이나 경고를 받았고(현 ITF태권도 규칙에서 등허리 쪽을 때리는 발차기는 반칙) 평소에는 좀더 다양하게 뚫고 들어가는 방식이나 발차기도 좀처럼 쓰지 못해서, 결국 평소보다 좀 더 경쾌하고 빠르게 진행햇을뿐, 기술 몇 개 없는 킥복싱 선수마냥 찌르기 몇번 날리고 돌려차거나 옆차찌르고 정도의 반복이었던 듯하다. 거의 시합이 끝나갈 즈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서 좀더 상대의 긴 팔을 피해 아래쪽으로 두어번 복부 타격을 성공시키긴 했지만, 그 정도의 유효타로 뒤집어지긴 어려운 시합이었다.



겉보기엔 내가 젊고, 공격 점유율도 많았으며, 시도 때도 없이 공격했다. 내 스스로 지쳐버릴 정도로 공격했기에 사실 주심 한 명, 부심 2명 포함해서 깃발 3개를 다 뺏길 정도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어쨌든 판정은 절대적이다. 거창 형님도 내 수준에서 무척 버거운 분이었고, 그 분도 검은띠에 어울리는 돌진력을 갖고 계셨다. 나는 사실 경기 중에 왼눈을 한번 세게 쥐어박힌 것 말고는 크게 타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회가 끝나고 엵이 점점 빠지면서, 3일째 된 지금도 양 무릎이 빠질 듯 쑤시고, 온 몸이 무겁고, 두들겨맞은 왼쪽 얼굴 쪽이 여전히 쓰리고 아프다. 결국 나이 먹으며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는 약해진 내구성이었다. 약해진 주량처럼, 나는 젊었을때 밤새 공부하거나, 혹은 시합하고 다음 날 바로 내 몸 상태를 바로 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며칠씩 골골거리기도 예사다. 가장 최적으로 준비했지만, 여전히 맞서기 결승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이번에도 은메달로 만족해야 했다.



3.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 결론: 마부작침磨斧作針


젊었을때부터 술과 시와 검으로 살아온 낭만적인 시인 이백도 어린 마음에 공부하기 싫어 멀리 도망나온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어느 할머니의 노력을 보고 감동받아 도로 공부하여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백의 재주를 아까워한 산신령이 친히 노파로 둔갑했다고도 하는, 이른바 마부작침의 고사다. 열자 탕문편에 실린 우공이산愚公移山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의 실력이 늘 노력에 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안다. 내 노력이 사회체육의 기준에서도 그렇게 대단치 않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러나 나도 가끔은 잘하고 싶은데, 이번 대회에서도 내가 바라던만큼의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햇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내 삶이 그래왔다. 공부도, 무공도, 예술도, 항상 노력했지만 부족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사랑했던 것마다 모두 폐허가 되었다고 했는가보다. 나도 늘 내 상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멀어 아득한 사람이었다. 평생 가야할 보람이 있는 길이지만, 소설가 김동인의 무지개처럼 결코 닿을 수는 없을 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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