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내지 말아주세요.
갑작스레 눈이 내리는 바람에 나는 늦게 퇴근하여 자정 넘어까지 눈을 치웠고, 잘 시간을 놓쳐 새벽 2시까지 뒹굴거리다 다시 아침 여섯시에 부스스 일어나 마저 쌓인 눈을 치우느라 주5일의 훈련+근무+불면까지 무척 피곤했던 토요일이었다. 아내는 피로와 졸음에 겨워 정신 못차리고 선인장처럼 예민해진 나 대신에 급한대로 소은이를 보느라 애를 많이 썼다. 나는 지난 주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인지 좀처럼 잠을 이겨내지 못했는데, 아내가 많이 애써준 덕택에 오후 11시부터 잠들 수 있었다. 비록 항상 꺠던 버릇이 있어 마찬가지로 두어번 꺠긴 했으나 그래도 토요일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교회 예배 보고 나서는 아내 좀 쉬게 하고 내가 소은이를 보려 준비 중이었는데, 웬걸, 전화 한 통 받고 온 아내의 얼굴이 핼쓱하였다. 여보야, 산불 났다니더, 내 비상 근무 떨어지뿌따 아입니까. (20여년전 군대 생각이 나버린 아저씨) 글믄.. 어찌케 지금 내려가야 하는거여? 미안해 우야노, 내 지금 바로 가야 되니더. 아내는 막 나와 딸을 키즈까페에 내려주고, 본인 겨울 옷 좀 사고 쉬다 올 계획이었다. 아내는 그대로 바람같이 사라졌고, 집에 가서 시부모님-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꼐 상황 설명만 하고, 옷만 갈아입고, 이번엔 같은 차로 어머니가 역에 태워다주셔서 바로 내려갔다. 제 어미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신나게 노는 아이를 보고, 마음이 허해서 검색부터 해보았다. 구미 산불만 쳐도, 천생 처음 듣는 천생산 화재에 소방 헬기만 12대 동원되었다는 속보가 나왔다. 나는 결코 동의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민주화의 거목이라던 노 정치인이 만리타국에서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새삼, 나랏일 하는 아내와 산다는 실감이 났다. 공직에 있으니 나라에 일 생기면 어디 있든 가야 하는건 당연지사라지만, 정말로 아내가 갑자기 가는걸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아내는 계엄 떄에도 새벽에 공문을 받았다고 했다.
아이에게 상황 설명을 해야했기에 그새 머릿결에 땀이 비치도록 노는 아이를 불러세웠다. 소은아, 이리 잠 와보소. 아이는 천진한 얼굴로 뛰어왔다. 응, 왜? 엄마 왔어? 엄마 어딨어? 엄마 왔으면 아빠는 가서 쉬어도 돼, 난 엄마랑 놀거니까. 명절이나 휴가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1주일에 딱 이틀만 제 어미를 볼 수 있다는걸 소은이도 모르지 않았다. 나이가 마흔이 넘는 제 아비도 얼떨떨한데, 갑자기 제 어미가 급한 일이 생겨 출근해서 다음주에야 다시 올라온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돈된 서울말로 겨우 입을 열었다. 소은아, 이 것 좀 봐봐. 아까 검색했던 산불 화재를 보여주었다. 소은아, 엄마 일하는데에 불 났대. 산에 불이 크게 났어. 그래서 엄마가 급해서 빨리 회사 갓다. 엄마가 많이 미안하대. 엄마 다음주에 올거야. 아이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듯해보였다. 갑자기 산에 불이 났다고? 엄마는 그럼 회사 가야 돼? 몇번 되묻고, 말을 곱씹던 아이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지며 되물었다. 그럼 엄마 회사 다시 지어야 돼? 엄마 어디서 자? 엄마 오늘 다시 기차 타고 와? ^^;;; 대략은 알아들은 듯했으나, 불이 난 곳이 제 어미 회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은아, 엄마 회사가 탄게 아니고, 엄마 회사랑 가까운 산이 불에 탔대. 그래서 엄마가 일이 많아져서 간거야, 엄마 회사 집이랑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상황이 이해되었는지 아이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히잉...그냥 소방차 부르지, 엄마가 꼭 가야 된대? 안그래도 어머니 역시 갑작스레 황망하게 다시 회사로 내려가는 며느리가 안쓰러우셨는지 근처 기차역까지 태워다주시며, 신신당부하셨다 했다. 소은에미, 절대로 애 생각해서 객기 부리믄 안되네잉, 불 끌라 막 덤비덜 말고, 남정네들헌티 맡겨, 저 짝으로 멀리 가 있으란 말이여. 아이고 어머이, 제가 무슨 특공대니껴, 저는 그냥 피해보고하고 서류 작업하고 그러는 깁니데이, 누가 저더러 불 끄라 하겠능교. 그거는 이미 다 유관부서 출동해뿐기라예. 그리고 끌떄 되모 끄야지 안 그라모 와 내려가니껴? 아따, 이 사람 말하는 것 잠 보소, 말이야 정승판서감이여, 아조. 암 소리 말고 어른 씨기면(시키면) 씨기는대로 혀. 뭔 일 생기믄 애랑 소은애비는 어쩔맹으로 그려. 고부간에 정답게 서로 걱정해드리면서 역까지 간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불길은 잘 잡혔고, 아내는 제때 회사에 들어가서 업무를 볼수 있었다. 나랏일로 가야되는 일 자체에 절대로 서운하거나 하지 않다. 아내는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간 게다. 다만 애초에 산불이 없었다면 안 가도 될 일이었다. 아직 그 산불이, 누군가의 실수인지, 방화인지, 자연 산불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제발 산불 내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자연도 자연이고, 일도 일이지만, 주말에 이틀 밖에 못 보는 한 가정의 주말에 아주 반동강으로 찢어집니다. 아, 주여!!!! 나 혼자 애 밥먹이고 씻기고 빨래하고 공부시키고, 이런건 너무 당연하고 아주 사소한 일이라구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