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비가 오다 갠 날 ; 임윤찬과 헤밍웨이와 우리 딸 사이에서

by Aner병문


새벽녘부터 비가 굵게 내려 잠을 좀 설친 날이었다. 낮에는 성큼 봄이 다가온 기색이 역력한데도 제법 날이 추워서 아이 옷 입히는데도 신경을 썼다. 아이는 제 동무들 따라 미술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학원을 가보고 싶다며 아침부터 성화였다. 제 고모가 안그래도, 아이가 갈수록 크는데, 뭐라도 하나 더 알려줘야 되지 않겠느냐며, 오늘 내가 일을 나가지 않으니 어린이집 끝나고 같이 가보자 했다. 요즘은 아이 귀가 밝아 어른들의 대화를 숨길수가 없다. 제 아비와 고모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아침부터 ’오늘은 학원 가보는 날이지? 피아노랑 미술이랑 해볼수있는거지?‘ 하며 신나 있었다. 아, 딸아, 벌써부터 사교육에 빠지려 하느냐...



늘 그렇듯,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놓고 도장에서 연습한 다음 다시 돌아오니,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는데 오후 1시가 넘었다. 서둘러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 널고,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임윤찬 선생의 바흐를 들으며 한 이십분 잠시 까묵 졸았다. 원래 책도 읽고 싶었는데, 훈련 방향을 바꾸면서 몸이 적응을 못한 탓인지, 아니면 요즘 회사가 연일 바쁜 탓인지, 너무 피곤해서 밥을 먹고 나니 책이고 뭐고 일단 피아노를 들으며 좀 잤다. 그래봐야 이십분이었다. 나는 고전 음악을 잘 알지 못하지만, 쇼팽은 선율이 복잡해서 누워서 듣기 적합치 않고, 바흐가 장중하면서 선율이 단려해서 잠들면서 듣기에는 좋다. 임윤찬 선생의 주법은, 고전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유려하다. 내가 건반이라도 그와 같은 손가락 아래서는 흐물흐물 녹아버릴듯한 기분이다.



설거지를 마저 하고, 이번 주 토요일 밥 잘하는 유진이가 시집가므로, 미뤄둔 이발도 하고, 정장도 꺼내어 보풀도 제거했다. 시간이 애매하여 어린이집 앞 빵집 총각의 빵과 커피를 마시면서 한 이십분 헤밍웨이를 읽었다. 털보 큰형님이 함께 읽자며 권한 킬리만자로의 눈, 이었다. 가왕 조용필 선생님의 명곡 중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이 소설에서 차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견과류를 잔뜩 뿌린 빵은 달고 고소했고, 커피는 알그레이 아메리카노라는 것을 주문해보앗는데, 커피에 차를 탄 탓인지, 향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최근에 회사 일이 바빠지면서, 나는 머리에 무엇을 넣기보다 계속 두드리거나 말하면서 비우는게 낫겠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헤밍웨이의 건조하리만치 단려한 문장을 읽으니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헤밍웨이는 코맥 매카시보다도 훨씬 더 건조하다고 느낄때가 많은데, 그의 남성성이나 방랑벽이 물씬 느껴지는 문체는, 황석영 선생과 맞닿아 있다 느낄떄가 많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알지 못하면 황석영을 제대로 읽어낼수 없듯, 전쟁, 야구, 낚시와 함께 미국 근대사를 읽어내지 못하면 결국 헤밍웨이도 완전히 이해할수 없겠구나 느꼈다. 헤밍웨이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처럼 먹고 마시는 내용이 자주 나오기는 하나, 90년대말부터 200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소설가들과는 또다른 방향으로 먹고 마신다. 하루키나 가오리의 먹고 마시는 장면이 떄떄로 불필요하게 길게 소비된다고 느끼는 반면,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성격을 드러낼수 있도록 필요한만큼 먹고 마시는 느낌이다.




책을 주문하기 어려워서 급한대로 e-book으로 다운로드 받아 읽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아이 데리러 가다 잠깐 비는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어 첨단기술도 때로는 좋다고 느꼈다. 어느 신문기사를 읽으니 갈수록 촘촘하게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블루투스 대신 유선 이어셋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블루투스가 간편하다고는 하지만, 그조차도 처음에는 페어링pairing이 필요하다. 페어링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 나는 항상 사람이 맨 처음 만나 격식을 차리듯 인사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 페어링을 한번 거치고 나야 그 다음엔 각 기기의 블루투스 목록에 기억되어, 누르기만 하면 비로소 간편하게 연결이 되는 것이다. 몇몇 이어셋 제조사의 전문가들은, 유선 이어셋은 단지 ‘꽂기만 하면 된다.’ 라며, 블루투스가 아무리 편하다 한들, 결국은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술의 끝없는 발전은 오히려 사람의 편리를 역전시켜 압박하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가 적응하고, 배우지 않으면 쓸 줄 없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털보 큰형님은 얼마전부터 AI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AI가 솔직히 무섭다. 인간 스스로의 이렇게까지 주체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놓아버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형님은, 방직기계를 도끼로 때려부수러 다녔던 네드 러드처럼, 피할 수 없는 시류라고 말했다.




피할수 없는 시류라면 아이의 사교육도 그러할까? 어머니는 가끔씩, 강남의 내로라 하는 아이들과 소은이가 어떻게 경쟁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시었다. 하기사 호남 쪽에 새 의대가 신설되면서, 벌써부터 젊은 부모들이 나주 신도시로 대거 이주하는 바람에 목동, 노량진 못지 않은 거대 학원가가 조성되고 있다는 뉴스는 본 바 있다. 공부는 분명 인간의 본분이고, 나도 아이가 기왕이면 ‘이름있는‘ 대학까지는 가주길 바라는 마음은 솔직히 있다. 그러나 아직은 책이나 더 읽히고, 태권도 낱기술이나 알려주고, 잘 먹고 잘 놀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어린이집에서 잔뼈가 굵은 여동생은 전혀 아닌 모양이엇다. 지금도 오히려 늦었다며, 올해부터는 꼭 미술이든 피아노든 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어린이집이 끝나자마자 등원 버스를 타고 인근 학원으로 가는 딸의 동무들이 많앗다. 미술 체험 교육에서, 아이는 제 동무를 만나서 손을 잡고 반가워 펄쩍펄쩍 뛰었다.



이상하게 하루 종일 피곤한 날이엇다. 나는 커피를 많이 마셨고, 껌도 자주 씹었다. 쉬는 날에는 신경이 좀 쉬어야 한다며, 아내는 쉬는 날에 내게 커피를 마시지 말라 했다. 그래서 쉬는 날에는 보통 항상 좀 멍해 있는 편이었다. 도저히 그렇게 늘어진 기력으로 소은이를 따라다닐수 없어서 억지로 커피도 많이 마시고, 껌도 질겅거리며 하루를 보냇다. 이제야 겨우 하루가 조용하게 잠들어간다.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 걱정이 너무 많다. 신경쓸 일이 너무 많다. 통장이 비어서 신경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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