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셈 씽 감독,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미국, 2006.
총각 시절, 여동생과 타셈 씽 감독의 백설공주를 본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동생 또한 누군가가 당첨된 이벤트 티켓을 양도받은 것이라 오죽하면 오라비랑 보러 갔을까 싶기도 하고, 나 역시 그 때는 백수 시절 시즌2 였던 터라 누가 커피든 술이든 사주면 황감하여 따라다녔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맨 앞자리에서 턱 꺾어 가며 보던 영화가 제법 눈에 남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잘 나가다 가끔 난잡할 정도로 발랄하다 싶었더니, 알고보니 '역시나(?)' 인도 영화감독이었군 그래. 타셈 씽은, 마이클 베이처럼 본디 뮤직비디오와 CF 등으로 이름을 날린 감독이었고, 이후 장편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특유의 영상미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그의 역작으로 이름이 높다.
주연 중의 한 축인 어린 소녀 알렉산드라 - 카틴카 언타루 가 다친 팔을 비뚜름하게 올려 고정시킨 채 보물상자를 들고 총총총 병원 복도를 달려가는 그 장면에서, 나는 감독의 숨결을 정말 코 앞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감독이 이 한 장면을 넣기 위해 정말 고심했겠구나, 라고 느꼈는데, 과연 '어느 영상이든 멈춰만 놓으면 바로 액자에 넣을 수 있는 화보' 라는 관객들의 평처럼, 무려 10여년 동안 18개국 26개의 장소를 찾아내고, 4년 동안 CG없이 촬영했다는 감독의 자부심이 빛난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스턴트를 촬영하다 부상을 입고, 또한 자신의 연인이 주연 배우와 사귀게 되는 바람에, 몸과 마음을 함께 다쳐 절망한 청년 로이와, 그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이민자 소녀 알렉산드라와의 서사 속에서 또 하나의 액자형 서사 구성을 이루어내는데, 알렉산드라가 이야기의 관객이 되면서, 관객과 알렉산드라 간의 공감을 이뤄지는 절묘한 구성이 대단하다. 결국 이 영화는, 영화가 최신, 최대의 종합예술이었던 1920년 할리우드 무성영화에 대한 찬탄이자, 더 나아가, 행복하고자 늘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영화 장면마다, 단 한 장의 필름조차 낭비하지 않고 관객에게 온전히 내용을 전달하겠다는 감독의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른바 '명징' 이동진 평론가는 '캔버스를 욕망하는 스크린, 붓을 동경하는 카메라' 라고, 나의 지리한 평을 아주 정확한 두 마디로 표현하셨는데, 실로 공감한다. 이 영화를 보면, 어째서 영화 또한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정확히 알 수 있으며, 반면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단순히 기계로만 영상을 짜넣으며 필름과 인력을 낭비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
사랑을 잃은데다, 하반신 마비까지 겹쳐 살아갈 힘을 잃은 우울한 청년 로이가 자신이 자살할 약을 훔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순수한 소녀를 꼬여내고자 지어내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흑인 노예면서 활의 명수인 오타 벵가, 오디어스 총독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인도인 전사, 신비한 나비를 죽인 총독에게 복수코자 하는 생물학자 다윈, 폭발물의 명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추방당한 폭파전문가 루이지, 숲과 고향을 빼앗긴 미스틱은 역시 총독으로부터 쌍둥이 형제를 잃은 블랙 밴디트의 여정에 함께 동참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로이의 이야기를 듣는 알렉산드라는, 그 이야기의 인물들을 욕망에 따라 본인이 알고 있는 지인들로 대칭하여 이해한다. 그러므로 더이상 살아나갈 힘을 잃은 로이가 파국적으로 이야기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죽여나갈 때, 아이는 이야기에 그만 깊이 개입하며 강렬히 절규한다.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들을 죽이지 말아요!
김종철 평론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안 보면 땅을 치고 후회한다' 라고 평했고, 이화정 평론가는 심지어 '안 보면 후회조차 못한다' 라고 했으며, 평점 짜기로 유명한 박평식 평론가마저 무려 7점을 주었으니 영화의 완성도는 말할 나위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일명 '이얼굴' 리 페이스 라는 배우의 매력을 한껏 볼 수 있어 좋았다. 마블 영화에서는 얼굴이 얼룩덜룩한 로난으로 나와 리 페이스인줄도 몰랐고, 그의 인생 자체를 뒤바꿔 놓았다는 '호빗' 시리즈는 아직 못 보았으며, 이 영화 초반까지만 해도 그저 킬리언 머피마냥 유약해 보이는 인상에 입술과 눈썹만 두꺼워 영 어색하구만, 하는 느낌이었다. 하나같이 너무 잘생겼다고들 해서, 그런가, 하는 느낌이었는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의 짙은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거나, 우수에 찬 눈이 입술과 함께 일렁이는 모습이, 허, 이 사람, 대단한 배우구먼,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화 한 편으로 어느 사람의 인상이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깨달았다. (하긴 보리밭에 부는 바람, 에서 킬리언 머피도 그랬지..ㅎ)
현재의 타셈 씽 감독은, 포스트 나이스 샤말란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같은 인도 출신 감독이기도 하거니와, 주목받던 초기작에 비해 뒤로 갈수록 힘이 떨어져 관객들이 많이 아쉬워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닌게 아니라 마블 영화가 휩쓸고 간 요즘의 영화계에는 힘 있는 걸작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좋은 감독이므로, 더 좋은 후속작을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