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
ITF 번외편 - 몸이 약해진다는 것.
몇 번이고 반복해왔지만, 무공을 오랫동안 연마했다고 해서 환골탈태하듯 체질이 쉽게 바뀌거나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공의 본디 모습이 강한 자를 대적하기 위해 약한 자들이 연마했던 기술의 총집합인만큼, 합리적으로 강해질 수는 있을터이나, 속된말로 도핑하듯 강한 체질로 바뀌기는 정말 쉽지 않다. 다만 십오년을 넘게 무공을 연마해보니 확실히 근육이 생기고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면서, 활력과 면역력이 높아지는 효과는 스스로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반면에 몸을 쓰지 않게 되면 금방 또 퇴락하여 오히려 운동의 재미를 모르던 때보다 더욱 녹슬고 마는 점이 안타까웠다.
아내가 아토피가 있는만큼, 나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비염이 심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배꼽이 참외꼭지처럼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어렸을때부터 말랐고 잔병치레도 잦았다고 했다. 어렸을때 어머니를 따라 온갖 한약을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기사 칠공분혈 무적의 권사 이서문 노사에게 팔극권을 익힌 수제자 유월협 역시 어렸을때는 몸이 약해 약을 밥 삼아 먹었다고 하고, 태권도를 만든 최홍희 장군께서도 어렸을 때는 한약을 달고 살았다고 들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외삼촌이 특별히 뱀을 잡아다 고아 먹이셨다고 하는데, 어렸을때 닭국물인 줄 알고 마셨던 비릿한 국물이 뱀이었구나,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여하튼 온갖 약을 장복한 끝에 나는 항상 몸에 열이 뻗치고, 밥이 꿀처럼 달아서 중학교 1학년떄
쯤에는 맞는 바지가 없을 정도로 아주 몸이 실해졌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께서 작은 키를 한탄하시며, 키가 못 크거든 몸이 옆으로 찌기라도 하라고 뭐든 먹이시던 시절이었다. 여하튼 약으로 살을 찌워도, 뒤늦게 무공을 시작해도, 이 비염만큼은 끝내 고치지 못해서, 나는 조금이라도 먼지가 있으면 정말로 재채기를 백 번을 넘게 해서 나중에 지쳐늘어져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훈련을 할때는 항상 땀을 배출하고, 몸이 뜨끈하여 가볍고 개운하지만, 요즘처럼 몸도 안 쓰는데다 잠까지 모자란 날에는 여지없이 훌쩍훌쩍 재채기를 하기 일쑤다. 사무실 누님들은 이미 짜증을 내신지 오래 되었다. 아이고, 훌쩍거리지 말고, 제발 코 좀 풀엇!
이번 주내내 눈이 가렵고 따갑고 뻑뻑하였다. 처음에는 애 키우느라 잠을 못 자서 그렇겠거니 하다가, 도저히 머리도 무겁고 자꾸 눈을 비비느니 아프고 따가워서, 마침내 안과를 찾아갔다. 나는 눈이 좋지 않아 일찍부터 안경을 썼는데, 임가 성을 지닌 선생님은 그렇게 치자면 같은 자리에서 벌써 40년 가깝게 병원을 해오고 있는 셈이다. 오랜만에 찾아가니 제아무리 내가 이 동네 토박이라 해도 못 알아보시는 것도 당연하였다. 선생님은 난생 처음 듣는 존댓말로, 여기 앉으세요, 허허, 하시더니 내 눈을 좀 들여다보자마자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지셨다. 요즘 재채기를 많이 하시나?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어찌 아셨을까? 게다가 안과에서 웬 재채기를 물어보시나 싶으면서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니, 알러지가 심하시구먼, 눈까지 올라왔어요, 눈이 가려우니까 자꾸 더 비비게 되고, 그러면 염증이 더 심해지지! 선생님은 내 눈에 물약을 좀 넣어주시고, 뜨거운 찜질을 해준 다음 약을 처방해주셨다. 나랏밥을 드시기 전에는 정규 간호교육을 받아 간호사였던 아내는, 내가 처방해온 약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아이고, 잠도 몬 자, 운동도 몬 해, 그라이까네, 면역력이 훅 낮아지가 여보야가 많이 힘드신 겁니도, 그 동안 애쓰셨이까네, 오늘은 아무리 소은이 울어도 귀 딱 막고 푹 주무이소, 하고는 귀마개로 내 귀를 막은 뒤에 침대로 올려보내었다. 그때가 오후 일곱시 전이었는데, 나는 새벽 4시까지 한 번도 안 깨고 푹 잤다. 아이는 다행히도 요 며칠 과는 다르게 잘 울지 않고 어미의 젖을 먹으며 잘 잤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나이가 먹으면 몸이 약해지는 걸 요즘 갈수록 느끼고 있다. 이십대 시절에는 2주만에 8KG 빼는 것도, 10킬로 넘게 찌우는 것도 예사였는데, 이제는 불어난 살이 도로 떨어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체력은 갈수록 마르고, 힘도 갈수록 처지는 기분이다. 적어도 가족 간의 갈등이 있다면 꼭 봐야할 영화 '파이터' 에서, 인파이터인 복서 동생을 연기한 마크 월버그는, 극중에서 잠깐 권투를 쉬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배가 나오고 몸이 불어버렸다. 그를 지도하는 체육관 관장은 혀를 차며, 몸이 이게 뭐야, 다시 나와서 운동 좀 하라구, 독려한다. 마약 중독자이자 아웃복서형 형에게 평생 눌려지내던, 실제 세계챔피언 출신이기도 한 미키 워드 역을 맡은 마크 월버그는, 손바닥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현역의 몸을 만들어낸다. 그 장면을 몇번이고 돌려보면서, 나는 내 체력과 실력을 어디까지 보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반면 장자였는가, 열자였는가, 지금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불패의 검객이 늙어 제자를 받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이미 늙어버린 스승이 과연 젊었을 때 실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지 의심하여 급습한다는 일화가 있다. 그 때 늙은 스승은 한가롭게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젊은 제자가 서슬 퍼런 장검으로 그의 등을 후리기 전에, 스승은 여유롭게 몸을 돌리며, 돗자리를 싹 빼어 그들을 모두 물에 빠뜨려버리었다. 일본 무도 설화에는, 다도의 명인이나 삿갓 만들기 장인 등이 별다른 무도를 익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가지 일을 오래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극의를 깨달아 능히 사무라이들을 제압한다는 일화가 종종 나온다. 아, 정말이지 고수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에취, 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