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교 폭력의 기억.
얼마 전 아내가 문득 물었다. 여보야, 우리 아아들이 어데 가 맞고 오면 우짤 낍니꼬? (잠시 생각하다가 딸을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척 하면서) 아이고, 어데 가서 깽값 물어주는 건 참아도, 맞고 오는건 못 참는다아~ 때리고 오너라~ 맞고 오지 말고~ (아내도 곰곰히 생각하다가) 칵! 그거 베테랑 황정민 흉내 아입니까, 장난치지 말고, 쫌! 글쎄요.. 여보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많이 맞고 자랐거든요, 그거 대물림해주기는 싫고, 그러니까 잘 가르쳐줘야죠. 참을 수 있으면 참고, 막을 수 있으면 막고, 그런데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도 왜 맞는지 모르겠다, 나도 억울하다, 또는 지금은 공격해야 되는 상황이다, 그러면 치도록 가르쳐야죠, 대신 상해 안 나게 잘 칠 수 있도록 가르쳐야하고, 또 아이가 자신의 정의에 가치관에 맞게 자기를 지키고 상황을 해결했다면, 나머지는 또 어른이 해나가야할 몫이고. 내가 사투리를 쓰지 않고 서울말을 쓴다는 건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증거기 때문에 아내도 곰곰히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아이고, 내는 잘 몰게따, 내는요, 여보야랑 달라가 어디 나가는것도 싫어하고, 중고딩때도 대학때도 방학 되마 핸드폰 딱 꺼놓고 내내 집, 도서관, 수영장, 교회만 와따가따 했그든요, 애들이 모 나 있는 줄도 몰랐고, 내 결혼할때도 아시겠지만 친한 동창도 몇 없다 아입니까, 그래서 근가, 나는 여보야가 그렇게 괴롭힘 당했다하는데, 안 그럴거 같던 사람이 또 그런 상처가 있다이까 신기하고, 또 우리 딸은 앞으로 우예 키워야 되나 고것도 걱정이고, 마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학교 폭력 구설수가 잊을만하면 한번씩 다시 나오지 않는가. 이미 여러 연예인들이 창피를 당해야 했으며, 인터넷이 발달하다보니 인터넷에서의 기록을 지워주는, 인터넷 장의사라는 직업까지 생기는 판국이다.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생각이 났다. 나 역시 어렸을때부터 성격이 차분한 편은 아니라서, 친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들의 수는, 대학교까지 합쳐도 손에 꼽으며, 오히려 블로그나 기타 인터넷 모임을 통해서, 오래 사귀게 된 친구들이 더 많았었다. 지금은 그조차도 적어져 정말 벗이라고 여길 이들 자체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만, 한때는 나도 생일 잔치 한번 한다고 하면 가게 한 구석 빌려다가 술 음식 쫙 깔아놓고 낄낄거리고 노는 것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십 대 때 사람 사귀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 반향이 더 클 것이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어쨌든 85년생인 내가 겪은 학교 폭력은, '최소한의 정' 은 있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그냥 동네 힘센 녀석이 숙제 좀 해오라고 그러고, 빵이나 체육복 심부름 시키고, 수틀리면 서너 대씩 장난삼아(?) 때리는 그런 정도였다. 숙제 해오면 선심쓰듯 만화책을 빌려주기도 했고, 빵 사오면 한 조각 정도는 떼어줬으며, 돈 뺏어도 차비 정도는 남겨주던 시절이었다. (혹시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그 옛날 추억의 책가방에서 임하룡 배우가 맡았던 그 정도 역할을 상상하시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보다는 조금 더 심했지만.) 요즘처럼 조직적으로, 돈을 때 맞춰 상납받거나, 물건을 갈취하거나, 심지어 성 착취까지 예사로 하는 폭력은, 적어도 나는 겪지도 보지도 못했다. 물론 내가 겪었던 일들을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혹은 커트 보네거트 스스로 부끄럽게 고백했듯이, '내가 그런 폭력을 겪어옴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것을 대물림하려는 어린 수컷적 욕망' 도 아니다. 다만 부모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듯, 폭력을 당했던 기억도, 결국 내 스스로 끊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내 스스로 진단해보자면, 나는 사실 학교나 군대에서 아무리 맞아도, 늘, 부모님께 혼나는 것보다는 덜 무서웠다. 어머니는 손녀를 보고 나서야 내게 말씀하셨다. 너를 서울대 법대 보내서, 참말 잘 키우고 싶었는디, 그게 내 맘시롱 안되더라, 니는 느그 딸 니가 알아서 잘 키워라. 나는 그 것이 적어도 어머니 선에서의 최선의 사과임을 알았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열성적으로 공부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아낌없는 지원을 하셨지만, 나는 그만큼의 깜냥이 못 되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너무 큰 욕망을 투사하셨을 뿐이다.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공부는 잘하지만 엉뚱한 아이' 로 전락했다. 그 때만 해도 또래집단에서 부모님의 권력이 투사되는 것을 '치맛바람' 이라 부르며 기피하던 시절이라, 어머니가 자주 학교에 찾아오시며 내 성적과 학습 태도 등을 물어보시는 것 또한 좋은 구설수가 되었다. 그 때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은, 요즘 생각으로 이해가 될지는 모르지만 '부당한 금수저 놈 혼내주는' 정의의 편에 가까웠다. 덧붙여 말하자면, 어머니는 회초리를 사다가 늘 선생님께 전달해드리며 '우리 아들 때려죽여도 절대 원망하지 않겠으니, 그저 사람 만들어주십시오. 공부 열심히 가르쳐주십시오' 라는 말씀만 하셨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좌우지간 나는 그렇게 12년을 보냈다. 초중고를 다 한 동네에서 다녔기 때문에, 나는 같은 학군에서 진학했고, 대부분의 동급생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한 반에 사십 명 정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한 반에 열 명 정도가 요즘 말로 항상 일진이었다. 나는 그들의 숙제나 체육복, 빵 심부름 등을 하며 학교 생활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 당시 제법 무서웠고, 억울했었다. 그래도 대들어 이겨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참으면 참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나는 어머니 말에 눌려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이 신뢰했다. 대학만 가면, 나비처럼 번데기를 벗고 힘차게 날아갈거야!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변화는 내 스스로 불러올 도리밖에 없었다. 나는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생각보다 치고 박는 일은 무섭고 두렵지 않았다. 막상 해보니,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고,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는데, 왜 나는 무조건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시키는대로만 했을까. 결국 가정에서의 태도가 학교에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 폭력의 기억을 많이 지웠다. 훗날 동창회나 예비군 훈련 때 조우하게 된 그들은, 볼때마다 서로 놀라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그토록 어깨가 넓어지고, 자신만만해질 줄 알지 못했다. 내 어깨를 찌르고, 팔뚝을 만지며 멋있어졌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튀어나온 배를 누르며 웃었다. 야, 니들 어렸을때는 날라차기 하고 살도 안 찔거 같더만, 이거 다 뭐냐? 그들은 대부분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나보다 먼저 아이를 낳아 사회의 쓴 맛을 보는 지친 아저씨들이 되어 있었다. 요즘엔 무서워서 자기 집 앞에서 담배 피우는 애들 뭐라 하지도 못한다니까, 하며, 왕년의 어린 골초들이 낄낄거렸을 때, 이미 어디서 본 듯한 아저씨가 되어 기억조차 없을 거라는, 황석영 선생의 문장이 떠올랐다. 조금 친해져서 소주 한 잔 마시게 된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걸려 있던 질문을 던졌다. 야, 근데 너희들 그 때 왜 그렇게 나 때렸냐? 단 한 명도, 나를 때렸다는 친구들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 엄청 친하지 않았나? 우리가 너 때렸어? 우린 너랑 엄청 친한 줄 알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맥이 탁 풀렸다. 여기서 더 파고들어 무엇할 것인가. 지들은 친했다는데, 기억도 안 난다는데. 그래서 그냥 소주 한 잔 얻어먹고 기억을 치워버렸다. 부모님과의 알력을 지우듯이, 그들과의 기억도 더는 생각치 않기로 했다.
아내를 비롯해 어떤 사람들은, 내가 훌륭하다고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를 탓했다. 그걸 그런 식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이 것은 내 문제일뿐, 다른 사람의 문제에도 나처럼 잊어버리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니 상관없다고 해주었다. 당연하다. 나는 지금 학생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고난을 겪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난척, 야, 그러니 너도 잊어버리고 말아라,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쪽 도시에서 고기 굽는 일을 하시는 싸장님이 내게 한 말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그런 식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잘 주는거야, 자기가 받은 상처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버리니까, 내가 주는 상처도 너도 잊어버려, 하고 넘어가버린다니까.' 당시 나는 내 성격을 감당하지 못해 지나치게 외향적이었고,그래서 벗도 많았지만 상처주는 이도 많아 구설수가 있던 무렵이었다. 철없던 시절 들었던 그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상처주는 사람인가.
가라테의 카타와 태권도의 틀은 모두 방어 자세부터 시작한다. 무공이 결코 폭력이 아니기에, 자신을 지킨 다음, 비로소 상대를 제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라테에는 선수(先手), 즉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딸에게 자신을 참는 법과 막는 법을 가르칠 것이고, 그 것으로도 충분치 않을 때 공격하지만, 반드시 사정과 여유를 주는 공격법을 가르칠 것이다. 상대에게 사정을 두지 않는 필살의 기술은, 나이가 먹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배워도 늦지 아니하다. 다만 우리는 때때로 다투면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수밖에 없다. 모여사는 일이란 원래 그렇다. 다만 요즘은 혼자서도 능히 먹고 살 수 있고 타인과 구태여 접촉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이 자꾸만 커지는 사회라서, 어떻게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보여 안타깝다. 항상, 내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했었겠지, 생각하며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개인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물론, 그것을 악용하여 그러므로 너도 용서하렴, 가해자가 제3자가 함부로 지껄여서도 안된다. 오로지, 당사자가 스스로 느껴 행동해야만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