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영화감평)

감독 장 뽈 라쁘노, 원작 장 지오노, 지붕 위의 기병, 프랑스 1995

by Aner병문

꼽아보니 벌써 두어달 째인데도 아이를 내려놓기만 하면 악명높은 등 센서가 삐용삐용, 아직도 자지러지게 울어젖히니, 아예 욕심을 끊고, 생활 방식을 당분간 완전히 분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즉슨, 1)아이가 울 때는 안으며 달래주고, 2)잠들면 어깨나 무릎에 얹어놓은 채 영화를 보고 3) 아내가 쉬고 나와 아이를 돌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살림을 하거나 공부, 훈련을 하는 나름의 3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 3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매력적인데, 성부-성자-성신도 3요소요, 근대 국가의 권력 분포 또한 3권으로 나눠져 있고, 우리가 현재 사는 세계 또한 3차원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삼각형은 말 그대로 반드시 3각과 변이 필요하고, 나는 언제쯤 3단으로 승단할지 알 수 없는데다가 곤충 또한 머리, 가슴, 배로 나뉘.. 아, 뭐라는 거야. 여하튼 아이는 낮에 극성스러운만큼 밤에는 비교적 길게 푹 잠들었는데, 정확히 59일째인 오늘 밤에는 무려 6시간을 한번도 아니 깨고, 일명 '통잠' 을 자서 나와 아내를 기쁘게 했다.



모처럼 달콤한 잠을 자듯이, 옛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되면 큰 기쁨이 오지만, 때로는 오랫동안 별러왔던 일을 행하는데도 기쁨이 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신다거나, 훈련을 한다거나, 혹은 이미 절판된 책이나 보드게임을 구한다거나, 아니면 잠시 잊어버리고 있다가 마침내 보게 되는 영화가 그러하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언젠가 어렵게 구했던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 )에 대해서도 다시 감평할 때가 있겠지만, 지붕 위의 기병은 프랑스 영화 탄생 100주년이자 원작자인 장 지오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걸작 영화로 이름 높다. 촬영을 지원한 르네 끌라망과 감독 장 뽈 라쁘노는 파산을 각오하고 투자와 연출에 임했으며, 그를 따르는 제작진 또한 당대의 일류들이 지원했다는 전설적인 작품이다. 아마 원작 소설가 자체가 마치 미셸 푸꼬처럼, 일세를 풍미한 거장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라는 점 때문에 뒤늦게 빛을 본 덕도 있을 터이다.



영화는 19세기 초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이딸리아는 국경이 닿는 프랑스에게 일부 영토를 내주고, 남은 땅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을 비롯한 여러 분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훗날 1,2차 봉기를 통해 이딸리아 통일을 이룩한 전설적인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활약하던 때도 이 무렵이다. 극중 이딸리아 기병대령 앙젤로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지만, 어머니로부터 혁명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아 프랑스로 피신하여 투쟁에 필요한 군자금 지원을 맡은, 의젓하고 냉철한 영웅이다. 사르데냐 왕을 따르는 왕당파들은 영화 초반부터 프랑스 곳곳에 피신한 이딸리아 혁명 투사들을 암살하기 시작하는데, 앙젤로는 이들을 피하다가 점점 콜레라가 퍼져가는(또 전염병이냐!) 프랑스 대륙을 누비면서 신산한 고생을 겪는다. 지금도 사회가 정비되지 않은 제3세계에서는 악명을 떨치는 콜레라인만큼, 아직 19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는 격리 수용 및 불태우기식 소독 말고는 딱히 대처할 방안이 없다. 비록 어찌 보면 원빈 같고, 어찌 보면 금성무 같은 미남자인데다 혼자서도 능히 프랑스 병사 몇 명쯤은 때려잡는 용맹한 앙젤로지만, 전염병 때문에 잔뜩 예민해진 백성들의 몰상식한 분노와 집단폭행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조국의 적들에게 쫓기고, 자신을 보균자라고 의심하는 무지한 백성들에게도 쫓기던 앙젤로는 기병대령의 지위가 무색하게 말조차 잃어버리고, 처량하게 지붕 위에 숨어 있다가, 비까지 만나 서둘러 불쑥 들어간 저택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귀부인 뽈린느와 마주친다. 이는 곧 프랑스의 국보급 여배우인 줄리에뜨 비노슈와 앙젤로 역에 꼭 맞았던 올리비에 마르띠네즈의 만남이기도 했다. 줄리에뜨 비노슈는 평생 공식적인 결혼을 한 적은 없지만, 당대의 예인들과 동거를 반복하며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올리비에 마르띠네즈와도 몇 년간 사랑하였다.



영화 자체는 마치 낭만적인 기사도 문학이나, 로맨스 소설, 혹은 김용 무협지를 보듯이 크게 특출나지 않다. 젊고 순진한 기사가 아름다운 귀부인을 호위하여 콜레라가 창궐하는 프랑스 땅을 누비며 남편에게 끝내 인도하는 과정에서, 나이 많은 남편을 둔 귀부인 또한 충직한 젊은 기사에게 끌리지만, 아련한 그리움만 남기고 헤어지고 만다는, 영화 켜는 그 순간부터 이미 결말까지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는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는 호평에 비해 흥행도 그리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영화 초반부, 강건한 턱을 지닌 앙젤로가 가방을 지고 허겁지겁 마굿간으로 달려가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잠든 아이를 어깨에서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영화를 보았다. 2주째 저출산대책 회의를 다녀온 아내가 문을 열었을 때, 이미 낮은 저녁이 되어 어둑해졌고, 나는 아내에게 아이를 넘겨준 뒤,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끝까지 영화를 마주보았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했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짙은 유화처럼 목가적이고 낭만적이었다. 25년 전 필름으로 새겨낸 화면의 색깔과 질감은 정겹고 편안했으며, 감독의 의도가 장면마다 명확히 배치되어 있어 소설가조차 경탄하겠구나 싶었다. 이를테면 앙젤로의 호기심과 미련을 표현하는 장치로 쓰인 고양이 등이 그렇다. 뽈린느를 찾아헤매는 앙젤로가 때때로 허공을 쳐다볼 때, 고양이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앙젤로의 시선을 대변함으로써 관객들의 집중을 도와준다. 마리옹 꼬띠아르 이전에 줄리에뜨 비노슈가 있었다는 말처럼, 동그란 얼굴과 가는 목선을 지닌 그녀가 우아하게 말을 달릴 떄, 나는 내가 탄 자전거가 한 마리 말이 되어 뒤따르길 바랐다. 25년전의 영화는, 숨가쁠만큼 명확하게 돌아가는 지금 영화에 비하면, 훨씬 여유로운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장 지오노의 지붕 위의 기병 은 우리 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그의 소설이다. 1951년 작인데다 절판되었으니, 이제 구해보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도 검색해보면, 고생을 무릅쓰고 책을 찾아 헤매어 끝내 읽었다는 이들의 감평이 제법 있다. 몇 년 전 어느 만화가는 어째서 판소리나 오페라 등의 '사장되어가는 예술' 에 나라가 앞장서 지원하는지 알 수 없다며, 차라리 사람들이 많이 찾는 대중예술에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 빈축을 산 적이 있다. 그의 주장에 굳이 불민한 나까지 나서서 대거리할 필요는 없으나, 고전 명작이 지닌 품격이란 몇백년이 지나도 깊은 울림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아, 사야 될 책이 자꾸만 늘어난다. 책장을 어서 장만해야겠다고 한숨 쉬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세계사편력은 드디어 3권째에 들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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