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아이를 재우느라 진이 빠졌을 아내 보기 미안하여 그래도 달달한 아이스크림 한 통 사들고 자정 즈음 서둘러 돌아갔다. 다행히도 애비 늦는 것을 알았는지 아이는 모처럼 일찍 잠들어 아내를 덜 피곤하게 하였고, 아내는 그 늦은 시간에도 남편 들어오지 않아 잠이 안 오더라며 돼지앞다리살 사다가 된장으로 양념하여 대신 재워두고 있었다. 아무리 아내의 허락을 받아 훈련도 하고, 하루 명분 있는 나들이를 했던들, 나는 밖에서 고기며 술이며 잔뜩 먹고 들어왔으니 괜시리 아내 보기가 면구스러웠다.
TV에서는 KBS 스페셜로 예전에 찍어둔 창녕 우포습지에 관한 내용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말이 습지지 낙동강 하류 유역과 맞물려 하나의 커다란 호수마냥 큰 지역이었다. 적당히 질퍽한 습지의 위에서 철새들은 가시연이며 줄풀 등을 뜯어먹고, 반딧불이며 쇠우렁이들도 노닐고, 또 물 아래에서는 참붕어며 가물치 등이 한창이었다. 말투만 전라도 말씨에 소꿉장난 같은 농사나 좀 지었을뿐, 간데없이 서울 촌놈인 나에 비해 아내는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역시 꽃이며 나무, 물고기, 곤충들을 척척 알아맞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뭍짐승 날짐승 물고기 곤충 초목 할 것 없이 부모되는 것들은 참으로 제 몸 바쳐 제자식들을 돌보더란 점이었다. 참붕어는 행여나 천적들이 제 알을 후루룩 마실까 염려하여 항시 경계하다 손수 숨을 불어넣어주기도 하고, 물자라는 제 등에 알을 아예 짊어지고 다니고, 물꿩 아비는 날지 못하는 새끼들을 제 품 속에 꼭꼭 숨겨 다리만 삐죽 나오게 한다. 소주에 맥주에 와인 섞어먹은 취기가 남은 나는, 앗따, 하잘것없는 미물도 제 새끼는 돌보는 거인디...하고 타령조로 말하다 아내에게 점잖게 한 말씀 들었다. 아이고, 쟈네들이 어찌 미물입니까, 그런 말씀 마소, 사람이 동물보다 더한 기라예, 내 산에 있음서 제 자식 내다뻐리는 동물은 못 봤습니데이.
민속종교, 불교, 도교, 유학 등이 뒤섞여 자생하던 한반도에서 비로소 기틀을 잡기 시작한 학문은 확실히 유학과 불교일 것이다. 두 영역 모두 윤리론과 삶의 방식을 논하고 나아가 정치에도 관여했지만 유학이 조선 초부터 정치의 중심이었던데 반해 불교는 역시 종교로서의 기반이 두텁다. 조선의 성리학은 육왕 정주가 울고 간다 할 정도로 세상의 운행 방식과 인간의 윤리 의식에 대해 매우 깊고, 독자적으로 발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서구화된 근대에 이르러 이른바 실학, 북학, 서학 등의 계파가 생겨나기도 했다. 한 가지 자신할 점은, 조선은 무엇보다 자주적인 학문의 나라였으며 근대 유럽 뺨치는 철학 이론이 대성했을 뿐 아니라, 철학에 정통한 이들이 관료가 되는 학술적 국가였다. 물론 시대의 한계상 많은 계급적 불합리와 갈등이 있었으나 적어도 우아하면서도 치열한 엘리뜨 국가로서의 일면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터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리기론 외에도 이른바 인물성동이론 논쟁이라 하여 인간과 동물의 성정은 과연 같은 것인지 논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윤리의 근본을 생각하기는커녕 서로 짐승만도 못하다며 물어뜯기 급급한 세상이 되었다. 혀와 손가락에도 칼이 달린 무서운 세상에 이 아비이자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늘 책을 읽어 스스로를 단속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에도 세계에 내놓을만한 훌륭한 철학 이론들이 있다. 하버드의 동아시아 연구소 교수들도 말씀하시듯, 우리 나라는 유일하게 유학자들이 지폐 초상에 그려진 나라가 아닌가. 학교 다니던 시절 생각하며 두세달 짬짬이 재미나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