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우리가 살면서 그리는 그림들은,

by Aner병문

부끄럽게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한자락할 큰 인물이 되리라 믿으며 컸었다. 사실은 책 읽는 재주밖에 없던 소심한 배불뚝이 소년이었는데, 우연찮게 서울 변두리에서 공부 좀 한다고 추어준 탓이 컸다. 차라리 당신께서 가시면 가셨을 불꽃 같던 우리 어머니는, 힘들게 명심보감이며 소학 강의하신 돈으로 못난 아들 책 사주시며 서울대 법대 꼭 가서(!) 집안을 일으켜야(!!)한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로부터 이십년, 나는 철학과 무공을 접하며 겨우 세상의 쓴맛을 알고, 나 따위 필부범부는 세상에 넘치도록 많기에 분수를 지켜 살기로 다짐했다. 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잡이로 나오는 숱한 서부극 중 한 종막에서, 그처럼 뛰어난 총잡이가 되고자 하는 소년이 밭 갈아먹는 아버지를 버리고 그를 따르려 하자 전설의 건맨은 소년의 손을 꼭 잡고 타이른다. 나는 비겁해서 총으로 악당이나 죽이면서 이 마을 저 마을 전전하는 떠돌이지만, 묵묵히 밭을 갈며 가족을 만드는 아버지야말로 진짜 영웅이란다.



그랬다. 내 스스로가 청운의 꿈을 버리고, 학교에서 속세로 나오고, 팔자에도 없는 직장 생활을 해보고, 그리고 못할 것 같았던 결혼에 자녀까지 얻으며 나는 필부의 삶조차 얼마나 무겁고 광활한지 깨달았다. 윤태호 화백의 미생처럼, 출퇴근 길에 흔히 보는 회사원들마저 모두 각자의 물결을 헤치고 역사를 만들고 있었으며, 그들이 매일 보는 도표, 쓰는 보고서, 결재 서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 거대한 알갱이였구나 실감하고 기가 질렸다. 어렸을 때의 나는 공부의 꾸준함보다 광기 어린 천재성을 동경했고, 평소의 근면한 훈련보다 기박한 변초일타에 목을 매었으나 이제서야 그러한 천하무비의 실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음을 깨닫는다.




요즘 나는 내 스스로도 실은 아직 젊지만, 나보다 더 젊은 신규 세대에게 몇 마디 얹을 시간들을 허락받고 있는데, 그들이 일하며 그려내는 그림들이 심히 어려워 속이 얹히는 기분이다. 우리의 직업 또한 막스 베버가 말한대로 소명에 의한 우리 삶의 일부라면, 그 직업을 통해 그려내는 과정 또한 그들의 삶일텐데, 그 젊은 세대들이 추진하는 일의 과정들이 내게는 몹시 차갑고 난폭해보여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차분히 일을 진행하여 사람을 돕는다는 마음보다 효율적으로 빠르게 나아가 달성하고 퇴근하자며 서두르는 이들 앞에서, 나는 벌써 꼰대가 되어버린 나의 힘없는 그림자를 볼뿐이다. 그 어떤 말도 무공도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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