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바꿀 수 없는 것들
요즘 회사에 연일 새로운 형님 누님들이 넘쳐나시어 눈코뜰 새 없이 바쁜데, 아내가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왔다. 여보, 잠깐 목소리 듣고 싶다, 전화줄 수 있어요? 평소에 회사 보안으로 전화기를 잘 들고 다닐 수 없는 점을 알고 있는지라 혹시 급한 일인가 싶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번 전화해보았으나 아내는 그새 뉘와 통화하는지 계속 통화중이었다. 이번에 휴대전화와 함께 통신사도 바꾸면서 통화중 수신 서비스를 아직 신청하지 않았는지 전화를 할 수 없어 괜시리 속이 탔다. 다행히도 장모님과 통화 중이었던 아내는 곧 연결되었다. 많이 차분해진 목소리긴 했지만 평소의 발랄함이 없었다. 괜찮십니더, 어머이랑 통화했니더, 아무 일 없어예~~ 그래도 괜시리 신경쓰이지 않을수가 없었다. 때마침 퇴근길에 CJ가 내일 친구 결혼 준비하느라 영어 공부가 좀 어렵다 하여 잘됐구나 싶었다. (아니, 근데 필리핀은 평일에도 시집 장가 가나? 대만이 그런다곤 하더만ㅎㅎ) 모처럼 아내를 위해 육회와 생고기를 좀 사고, 작은 사이다도 한 병 사고, 나를 위해서는 빨간 소주 한 병... 유후!ㅋㅋㅋ
비록 달걀에 버무리지는 못했지만, 양념에 비벼놓은 육회에 방금 잘라놓은 생고기를 곁들이니 성찬이었다. 사이다를 따라드리고, 생고기에 겨자를 살짝 발라 기름소금장에 찍어 권하니 아내는 꽃처럼 웃으며 잘 먹었다. 연유를 들은 즉, 최근에 전화기를 바꾸면서 결합상품으로 월 4만원짜리 채널 요금제를 결제했는데 지금 보니 TV도 잘 아니 보는 우리 환경에 채널이 너무 많고 요금도 비싼거 같다며 그 생각에 속상해서 울상이었다 했다. 나는 소중한 빨간 소주 한 병을 꺾어서 아껴마시며 아내를 달랬다. 이미 지나간 것을 어쩔 맹인가, 아, 클래식 채널도 4개도 되고, 격투기 채널이랑 외국어 공부 채널도 있고 좋고만 그려, 여보 좋아허는 다큐 프로랑 애기 보는 채널도 많응게 남는 장사여, 혹시 나가 돈을 제대로 못 벌어서 여보가 월 4만원 쓰기도 맴이 무거운가? 아내는 그건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소, 이미 결정한 것 가지고 맘 써봐야 뭐헐 맹인가, 억만금을 갖다내버렸어도 집이 조용해야하는 것이여. 짐짓 배포 큰 호걸마냥 사투리 진하게 써서 아내를 다독이고는 말았다.
그러므로 엘프 이루릴이 하루 세 번 후치 일행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스스로가 후회를 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후회... 그렇군요, 과거는 이미 정해져 바꿀 수 없는 것인데, 손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배웠어요, 마치 인간처럼요. 또다른 작품에서 동일한 소설가는 노예 오스발의 입을 빌어 후회를 달리 정의한다. 선택받지 못한 부정된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살면서 후회하고 부정하고 괴로워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자신의 선택이 무조건 옳아야 한다는 집착이 번뇌를 낳는다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이 애초에 옳을 수 없으니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하시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깟 4만원 쓰더라도 아내가 걱정하지 않는 삶이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