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영화 감평)
감독 데이빗 리치, 아토믹 블론드, 미국, 2017.
본디 전문 스턴트맨 출신으로, 아토믹 블론드 외에도 존 윅 시리즈, 데드풀, 분노의 질주 : 홉스&쇼 등으로 승승장구 하는 데이빗 리치 감독이다. 오우삼 감독의 영화에 특히 잘 드러나듯, 영화 감독들 역시 연출을 통해 이른바 영화 언어를 구사하는데, '뱅글뱅글 돌려차기' 액션 씬이 들어가면 아, (또) 정두홍 감독이구먼, 알수 있듯이, 액션 감독들 또한 독특한 '합' 이 있다. 이를테면 90년대를 풍미했던 황비홍 특유의 액션 씬을 반드시 서극 감독이 연출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제목도 멋있고, 주연인 샤를리즈 테론의 매력도 넘치고, 환상적인 ost에도 불구하고, 이게 과연 데이빗 리치 감독의 액션이 맞나 싶을 정도의 의문을 자아낸다. 샤를리즈 테론도 제임스 맥어보이도 영화 속 정보원으로서 최고의 매력을 지녔지만, 그녀를 통해 리치 감독의 액션을 구현했기 때문일까? 다른 영화에서 몇번씩 돌려보던 박진감 넘치는 액션에 비해, 이 영화의 액션은 처절하다 못해 힘겹다. 사실 실제로 봐도, 샤를리즈 테론은 너무 마르고 가볍다. 범죄도시에서 장첸이 마석도를 상대할때, 그는 체중차를 줄이기 위해, 고류 태권도를 방불케하는 타격기를 선보인다. 그래봐야 결국 곰 같은 마석도가 한번에 업어치기로 내던지면 그만일테지만, 눈알, 목젖, 다리 사이 등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장첸의 살벌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균형이 맞았던 것이다. 반면 샤를리즈 테론이 열연하는 로레인은, 영화에서의 틀이 잘 받쳐주는데도 불구하고 늘 액션이 위태위태하다. 아니, 그 정도 체중차인데도 왜 그렇게 타격기만을 고집하는지, 아니면 진작에 칼이라도 좀 들던가... 만약 존 윅이었다면 벌써 읃어터졌....
영화는 잘 만들었다. 시쳇말로 쌈빡하다. ost는 정말이지 최고다. 서서히 냉전이 종식되어 가는, 유럽을 배경으로 해서 정보원들의 부나방처럼 위험한 상황을 잘 연출했다. 물론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 서사는 느슨했지만, 애초에 데이빗 리치 감독의 영화는 그런걸 따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액션씬이 뒤로 갈수록 위태로워서 정말 아쉬웠다. 샤를리즈 테론은 정말 맞춤한 배역으로 이뻤는데, 왓챠 플레이 댓글들이 하나같이 너무 무서워서 무서웠다. 나는 이 영화에서조차 성별 갈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특히 '남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007의 서사적 약점이 묻히고, 여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아토믹 블론드의 서사적 약점이 부각되는 것은 매우 비겁하다' 라는 내용의 댓글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 을 선언했다. 제목만 보면 굉장히 비관적인 듯하지만, 사실 그가 선언한 것은, 헤겔과 맑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종식이었다. 더이상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흔들거나, 또는 계급간의 살벌한 투쟁 대신, (미국을 필두로) 자본주의적 낙원이 꽃필 것이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추측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시만 해도 007영화의 공식적인 적들은 늘 소련이었으니, 그러한 소련이 스스로 붕괴한 상황에서 무리도 아니지 싶기는 하다. 반면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 을 통해, 비록 동서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오직 이념의 충돌만이 사라진 것이며, 앞으로 국가-문화-종교 등을 단위로 하여 새로운 충돌과 갈등, 발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이 제시되었다. 문명의 충돌은 다시 훗날 '문명 내의 충돌' 로 반박된다. 디터 젱하스는, 문명 내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갈등이 생산되며, 이 갈등은 국제 정치에 막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아토믹 블론드- 원제 아토믹 스파이의 댓글을 보면서 나는 괜시리 비감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닌게 아니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며, 냉전이 종식된지도 벌써 30년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마스터 키튼' 에서도 지적하듯, 옛 동독과 서독의 차이는 아직 좁혀지지 않았고, 러시아 역시 아직 전 체제의 폐해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 당시의 간첩, 정보원들은 모두 햇볕을 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왔을 거라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분쟁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정보원들은 새로운 분쟁을 찾아 헤매인다. 우리는 아직도 세계 유일의 휴전국에 살고 있다. 이미 있는 분쟁들조차 너무 많은데, 우리는 있는 평화조차 지키지 못하고, 날선 말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오래 전에 끝난 전쟁 영화에 달린 댓글들이 아직도 서로를 공격하고 있어서, 나는 그게 너무 슬프고 가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