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때아닌 역질에 갑자기 휴가(?)가 생겼다. 아내와 아이가 조리원에 있는 동안 나는 출퇴근을 하면서 그 주변에 얼씬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 도장에 가고, 돌아와서는 책 몇 줄이라도 더 읽고 잠드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너도 볼 수 있었다. 요즘 일을 쉬고 있는 너는, 금 간 갈빗대는 뒤로 하고 오히려 더욱 동서남북 종횡무진 돌아다니기 바빴다. 은근히 술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거니, 때마침 받으며 킬킬거렸다. 하기사 언니도 다음 주에 오시니까, 너도 이제 당분간 진짜 보기 어렵겠지, 퇴근 시간에 맞춰 갈게. 코로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서울의 비싸고 싼 지역을 따로 가리지 않아서, 안 그래도 늦게까지 운영하는 술집이 별로 없는 강남 주변은 더더욱 황량했다. 다행히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점심 시간 나절에는 문조차 열지 않아 아예 문을 닫았나 싶은, 오두막 같기도 하고, 옛날식 조개구이집 같기도 한 골뱅이집이 새벽 2시까지 한단다. 검색해보니 골뱅이와 칼국수 맛집이라나. 평소에 해산물도 잘 챙겨먹지 아니하고, 칼국수도 좋아하는 너에게는 여러 모로 맞춤이구나 싶었다. 게다가 밤에 맞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해 술맛이 더욱 났다.
표현하기도 어려운 직장에서 한 달 고생하고 나온 너는, 훨씬 얼굴이 좋아져 있었다. 먼저 자리 잡고 기다리던 너는 걱정하던 서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소녀 같았다. 10년 전쯤 너는 병원에 있던 나를 보려고 버스를 타고 서울의 등뼈를 따라 2시간을 넘게 달려 안양에 왔었다. 제 몸뚱이만한 호두파이를 들고 나비마냥 팔랑대는 원피스에 얼굴이 하얘서 짙은 눈썹이 더욱 도드라졌던 너를 아직도 기억한다. 너는 그때도 물망초 같기도 하고, 백합 같기도 한 소녀였다. 너는 항시 내게를 무언가를 배웠다 말하지만, 나는 너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긴 커녕, 오히려 늘 철없이 의지했었다. 너는 항상 없는 돈에 나를 거둬먹였고, 때로는 귀를 항상 열어주고, 때로는 꾸짖고 혼내며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키워주었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솔직히 내가 하나도 재미없었고,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계속 연은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었다. 그 관대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너가, 나를 깎고 쪼아 다듬어준 덕택에, 나는 겨우 사람 구실 반이라도 하고 살며 아내에게 보탬이 되었다.
엄마가 애기 아빠까지 됐는데 너 뭐하러 만나냐고 하시대. 위생장갑 낀 손으로 빨간 골뱅이 무침을 비비면서 너가 코에 주름을 잡았다. 우리는 항상 만나면 자주 술을 마셨고, 사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사는 이야기를 하다 겹치는 책이나 영화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보면 밤은 깊고 너와 나는 얼큰해져서, 킬킬거리며 각자의 집으로 향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집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 생겼다. 아내는 항상 내 몇 안되는 친구들을 소중하게 대하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내는 내 술은 걱정했지만, 너, 혹은 곽군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는 아직까지 타박하신 적이 없으시었다. 아내가 안부 전해달라셨어, TV에서 얼굴 하얗고 작은 여자만 보면 너 닮았다고, 맨날 그러시네. 십 년 넘게 수영을 하고, 간호사를 거쳐 지금은 산을 돌보는 일을 하시는 아내는, 키가 크고 몸이 실했다. 나보다도 10CM가 큰 장신의 아내는 늘 어른들이 믿음직하게 여겼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늘 꽃 같고 별처럼 팔랑대는 너가 아기 같아 귀엽고 부러웠던 모양이다. 너는 헤죽 웃으면서, 언니한테 안부 전해줘, 언니가 날 미워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이야 했다. 우리의 우정은, 항상 굴곡이 많았다. 나는 언제나 천연덕스럽도록 굳건한 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강남에서 늦지 않게 돌아갔다. 나는 빗길을 헤매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아내가 없는 집 안은 춥고 허전하였다. 술을 입에도 대지 아니하시는 아내가 내 음주 습관을 자주 걱정하시므로, 나는 겨우 소주 1병에 맥주 몇 병 말아 구색만 맞추었다. 애매하게 술에 취하여, 나는 괜시리 새벽에 또 잠들지 못하고 책과 영화만 뒤적이다 겨우 까무룩 눈을 붙였다. 항상 너에게 감사한다. 쉬는 날에는 아내를 만날 수 있다. 좋은 벗이 있어서, 나는 평생 함께 할 내 아내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