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

ITF 751일차 - 근 6개월만에 훈련을 하다.

by Aner병문

십대 시절 나는 요즘 말로 아싸 중의 아싸라서, 늘 거친 벗들의 체육복, 음료, 도시락, 숙제 심부름 등을 도맡아 했으며(그래도 시절이 그러했던 탓인지 돈을 빼앗기지는 아니했다.), 체육시간에는 늘 도망다니며 겉멋 들어 랭보 시집이나 읽고, 짐 모리슨 음악이나 듣던 내가 운동, 그것도 격투기 종류의 무공 훈련에 폭 빠지게 될 것이라곤 절대로 생각지 못했다. 내 스스로 이십대에 생각하기를, 격투기란 결국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제압하고 나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일까, 나도 꼴에 수컷이라고 본능에 깊이 각인된, 마치 천명관 선생스러운 마초 본능만큼은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학한 학교는 택견 중에도 결련택견으로 몹시 유명하였고, 그래서 나는 나이 스물에 팔굽혀펴기는 하나도 못하는 주제에, 택견에 입문한 후, 이후 권투, 합기도, 검도, 종합격투기, 주짓수, 킥복싱, 중국권법 등 다양한 무공에 허위허위 빠져들었다. 물론 요령없고 가난했던 청춘, 여기저기서 조금식 얻어배우느라 안 그래도 기초 없던 내 몸은 부상을 반복하며 빠르게 약해졌다. 겉으로는 점점 강해지는 듯하여 누가 청하지도 않은 동창회에 나가 제법 호기도 부릴 정도였으나, 속으로는 삭아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좋은 스승들에게 사사했으나 체계적인 수련이 없었던 탓이다. 덕분에 나는 몇 개의 기술을 배우는 동안에도 왼쪽 발목 인대와 양 무릎 연골, 어금니까지 하나 날려먹었다. 이쯤 되면, 나이 서른 가까운 아들 대신 몰래 도장이나 체육관에 찾아오셔서 제발 우리 아들 사람 패는 운동 가르치지 말라고 하소연하시어 늘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셨던, 어머니만 탓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대단치도 아니한, 이상한 고집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충주에서 지내시면서 택견을 보신 적이 있으신 터라, 처음부터 내 운동을 기꺼워하지 않으셨다. 어렷을때부터 잔병치레 많고 책이나 읽다가 사내 자식들에게 얻어터지고 오는 아들이 뭐 그리 반가우셨으랴만, 막상 운동을 한다니 마뜩치 않아 하시다가도, 택견이라고 하니, 왜 하필 무당 춤추는것마냥 한복 입고 덩실거리는 짓을 하냐고 노발대발이시었다. 차라리 하려면 태권도를 하라고 소리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 소원은 십년 뒤, 내 나이 서른살에 겨우 반만 이루어졌다. 나는 흔히 올림픽 태권도로 널리 알려진 WT 태권도가 아닌, 일명 북한태권도 라고 불리는 ITF 태권도에 입문했다. 지금까지 생각해오건대 확실히 강호에는 아직 필연이 남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사사했으며, 앞으로도 사사할 사범님은 청춘을 다하여 북한태권도로 왜곡된 ITF태권도를 위해 청춘을 바치신 젊은 지도자로서, 나는 이분께 비로소, 그 동안 두서없이 배운 모든 가르침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훈련할 수 있었다. 무협지로 치자면 늦은 나이에 정파 입문을 한 것이다. 흔치 않은 ITF 도장에 흔치 않은 성인 태권도장이었다. 요즘에는 여러 영화, 책 등의 영향으로 젊은이들 많이 모이는 곳 중심으로 성인 WT 도장도 생기고 있지만, 불과 5~6년전만 해도 어른이 태권도장을 기웃거리면, 학생부밖에 없다고 축객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왜 하필 또 북한태권도냐고, 아직 빨갱이 근성을 못 고쳤다고 한숨 쉬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나는 차근차근 태권도의 정립된 체계 아래서 무공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공 다루기도 어려워하는 둔한 몸에다 십년 동안의 고련이 겹쳐, 나는 누구보다 오래 걸리고 둔했으나, 마침내 3년만에 초단 띠를, 신혼여행 후 귀국한 바로 다음날에야 겨우 2단 띠를 받을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철권의 화랑으로도 유명한 ITF는 원래 심사가 길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둔한 내게는 그저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태권도는 책 읽는 것처럼, 즐거웠다. 십대때의 나는 마치 제가 아인슈타인이라도 된것처럼 몸 쓰는 일을 왜 그리도 경시했을까. 나는 끝내 학교에서 배움을 다하지 못했고, 농사도 짓고 물건도 팔면서, 십대의 내가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다. 삶이란 물론 원래 그런 것이다. 선하고 무던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린 지금, 나는 비록 내가 상처드린 분들께 늘 죄송스럽고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끝내 남아 있는 내 삶에 항상 감사한다. 내가 뒤늦게 익힌 무공의 길은, 삶의 태도와 같았다. 내가 읽었던 책의 가르침들이 태권도의 동작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주워 섬겼거나, 아직 익히지 못한 다른 무공에도 분명 새겨져 있을 터이다. 영화 자체는 볼 것 없었으나, 이연걸과 성룡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어느 외국 영화에서 취선을 열연한 성룡은 말한다. '화가도 작가도, 모두 자신만의 쿵푸를 할 수 있다.' 아, 그러고보니 성룡은 다른 영화에서 윌 스미스 아들내미를 가르치며 한 마디 더했다. '우리의 모든 동작들이 바로 쿵푸다!'



서론이 길었는데, 우리의 모든 삶의 동작이자 가치관이 태권도임에도 막상 결혼하니 훈련량이 현저히 떨어졌다. 나는 오로지 무식하게 양으로만 밀어붙이며 훈련해왔다. 지금은 또다른 사범으로 승단한 당시의 부사범님을 비롯하여대부분의 사형사제 사매사자들은 나보다 젊고 능란하였기에, 나는 오로지 시간을 더 투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선에 이어 결혼-주말부부-출산으로 이어지는 이 빠른 삶의 궤도 속에서, 나는 더이상 옛날처럼 책을 읽을 여유도, 훈련을 체계적으로 할 여유도, 술 한 잔 제대로 할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아내를 만난 후로 마음을 너무 놓아버린 탓인지, 나는 그만 그동안의 근육 염증이며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도장을 6개월 정도 쉬어야 했다. 그동안 오로지 도장에서 사사받은 날짜만을 꼬박꼬박 적으며 훈련해오던 내 삶의 일부가 잠시 그렇게 멈추었다.



세상이 어지러워 역병이 돌고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웠다. 이십대를 넘긴 나는, 그 시절처럼 반드시 내가 지켜야할 절대적 진리나 신념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고, 설사 그런 것이 있다 한들 감히 나 같은 필부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역사는 민중의 것이지만, 주자는 치지(致知)코자 하면 격물(格物)하라 했고, 평천하 이전에 수신(修身)이나 하라 했다. 물론 대선생께서 이런 어투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념이나 가르침을 말하기 이전에 내 몸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몸의 아픔을 다스리고, 아내와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었다. 내 실력은 늘 유단자뿐 아니라 젊은 유급자 사제들 보다도 못한 바닥이라고 여겼는데, 오늘에서야 근 6개월만에 조리원에 계신 아내의 허락을 받아 예전처럼 새벽 훈련을 나가보니, 마치 상대성이론마냥, 바닥 아래 바닥이 있었다. 15킬로그램이 쪄서 띠 바깥으로 뱃살이 넘고, 도복이 작았으며, 체력, 근력, 유연성은 둘쨰치고, 틀(품새)의 일부조차 잊어버려 결국 유튜브를 보며 다시 외워야 했다. 그러나, 모자라기 때문에 늘 노력하는 것이고, 창시자 님께서는, 게으르고 싶은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 태권도인의 덕목이라고 하셨다. 근 6개월만에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조리원에 더이상 갈 수 없음을 핑계삼아, 도장에서 혼자 마음껏 태권도의 시간을 즐겼다. 아내는 우리 남편 신나면 되었다며 딸과 함께 웃는 사진을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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