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연성결, 중원문화, 2008.
연성결은 김용판 암굴왕, 또는 무협판 몽떼크리스토 백작으로 일컬어진다. 읽어야될 책들이 산더미인데, 짧은만큼 부담이 없어 좋았다. 우연한 기회에 누명을 쓴 주인공이 기연을 얻어 절세무공을 익히고 무림을 평정하여 억울함을푼다는 서사는 비단 무협지뿐 아니라 어느 장르소설, 아니, 심지어 고전부터 현대를 관통하는 문학의 상투적 설정이다. 그러나 누구나 잽을 칠 줄 안다고 바실 로마첸코가 되지 않고, 누구나 글을 쓴다고 김소월 백석이 되지 않듯이, 판에 박힌 복수극조차 신필의 손이 닿으면 한 떨기 처절한 꽃이 된다.
주인공 적운은 본디 농사나 짓던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으나 우연찮게 철쇄횡강 척장발의 눈에 들어 그의 고명딸인 척방과 함께 당대 최강의 검법이라 일컬어지는 당시검법을 연마한다. 당시검법은 말 그대로 당시(唐詩)의 싯구를 검으로 표현한 무공이다. 훗날 사부의 다른 사형제들- 즉 사숙들 및 그의 제자들과 회동하는 자리에서 적운은 무식한 스승이 당시검법의 싯구나 초식 을 올바로 기억하지 못해 엉망진창으로 전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욕을 당한다. 척장발, 언달평, 만진산 이 세 사람은 당시검법의 본이 되는 연성검법과 신조공을 익힌 당대의 고수 매념생의 세 제자들이었는데, 연성검법의 비급인 연성결을 찾아 본파의 무공을 복원하려 하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하나같이 반복하며 으르렁대기만 한다. 순박한 적운은, 이유도 알 수 없이 그 싸움에 휘말려 첫째 사형 만진산의 아들 만규를 비롯한 여덟 제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심지어 오른손가락이 한 마디씩 모두 잘려 제대로 검조차 쥐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만다.
이 꼴을 하고 감옥에 갇히니 정말이지 중국의 에드몽 당테스다. 당테스는 암굴왕이 되기 위해 비밀리에 보물 지도를 건네받지만, 연성결은 무협지이므로 당연히 감옥의 기인 정전으로부터 절세의 무공 신조공을 전수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지금부터 팍팍 풀리지도 아니한다. 정전은, 적운의 사조인 매념생과 얽혀 있으며, 또 몸에 절세의 신공을 지녔음에도 정에 깊이 묶여 감옥을 함부로 나가지 못한다. 사부의 딸이자 사매인 척방과 깊이 정이 든 적운 또한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짧은 단편은 격렬한 애정과 그리움의 세계로, 또한 잔혹하고 처절한 복수극으로 정신없이 내달려간다.
중국의 인문학과 예술에 깊이 통달했던 김용 선생은 무공 초식을, 철학 사상이나 예술적인 개념으로 빗대어 쓰기를 좋아했는데, 이 단편에서는 당시검법의 우아함이나 무공의 고하를 묘사하기보다도, 감정 또는 욕망에 얽힌 인간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무너지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낙화유수 로 대표되는 남방 무림의 네 고수들부터 무공이 얕은 연성문의 뭇 제자들까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숨겨온 모습이 벗겨지고 끝내 처절히 파멸한다. 당연히 적운은 복수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본디 바라던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지는 아니하였다. 복수를 끝마친 그는 여전히 살아가야 하기에, 새로운 삶을 살아갈 곳을 찾아 어디론가 표표히 떠난다. 영어 공부를 위해 타일러와 함께 보는 위 베어 베어스에서도, 3마리의 곰들은 불도저로 뭉개진 동굴에 집착하기 보다, 새 동굴을 찾아 정착하였다. 산다는 것, 원래 그런가보다. 멀리서 보면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면 어디든 굴곡과 흉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