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부부수난기
교회 가기 전 삼십분전, 나도 출근하여 없고 아이는 배고프다 떼를 써서 손녀 먹이라 어머니가 정성껏 고으신 오리탕에 만 밥그릇을 소은이가 깔깔 웃으며 만세부르듯 뒤엎었을때 아내도 그만 허탈하여 웃어버렸다고 했다.
인천 화백 사범님께서 코로나 시절 또 언제 맞서기 허락날지 모른다며 온몸의 근육을 구석구석 쓰는 연습을 시키시던 날, 아내가 몸이 살살 간지럽다며 빨리 와주기를 부탁하던 날이 지난 금요일이었다. 다른 사제 사저께 도장 청소 부탁드리고 후딱 집으로 돌아가긴 했으나 사실 내 피로도 이미 한껏 쌓여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주5일 근무를 마친데다 생일 즐겁게 보내려고 다음 근무를 주6일로 맞추어 휴무를 3일 연잇도록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평소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온 살갗이 가려운 아내가 걱정되어 서둘러 돌아가니, 아뿔싸, 아내는 이미 눈두덩이 붉게 오른 팬더처럼 지쳐 늘어져 있었다. 늦은 밤, 서둘러 집을 정리하고 아내를 재웠다.
다음날은 사람 놀리듯 하루종일 소나기가 내렸다 해가 나기를 반복했다. 아내는 약을 먹고 얼린 수건을 가려운 부위에 대고 하루종일 기운없이 누워있었다. 원래 아내의 가려움증은 처녀 적에는 견딜만한 수준이었고 자주 있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에게 제 몸을 양분삼아 좋은 것은 고루 퍼준 탓인지 아내는 출산 후 체질이 바뀌어 잊을만하면 몸을 긁으며 괴로워했다. 나는 그때마다 도자기를 깬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신세한틴을 했다는 욥을 떠올리며, 저것이 어미의 숙명을 죄처럼 지은 여자의 삶인가, 사내는 평생 가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것인가 싶어 입이 썼다. 아비어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열일곱달의 딸은, 장마에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니 기운을 주체할수 없어 온 집안을 휘젓고 어지럽혔다. 근육통에 지끈대는 몸으로 온종일 쫓아다녀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참 높은곳 오르기를 즐길때라 위험하다 말리면 목을 놓아 울며 떼를 썼다. 하루종일 소란통에 전화조차 신경쓸수 없어 반찬 주러 어머니 오신줄도 몰랐다. 어머니는 한껏 신경이 곤두선 아이를 달래느라 수박을 잔뜩 먹여 겨우 진정시켰는데, 우리끼리 얘기지만 아이는 결국 새벽녘 수박을 다 토하고는, 씩 웃곤 다시 잠들었다.
새벽내내 삭은 수박과 우유비린내가 진동하는 집에 아픈 아내와 기운이 남아도는 아이 둘만 두고 주말 출근을 하려니 마음이 좋을리 없었다. 아내는 같이 교회만 다녀와서 아이를 잠시 어머니께 맡긴다고 했지만, 예의 그 오리탕 빵빠레 사건이 터지자 헛웃음이 터지면서 그냥 어머니께 맡아달라 부탁드렸고, 어머니도 깔깔 웃으며 아이를 데려가셨다했다. 아내는 드물게 교회도 거르고 하루종일 잤다고 했다. 나는 퇴근하고 천천히 밥을 안치고, 빨래하고, 아이 없는 김에 대청소를 하고 남은 반찬을 정리하고 아내의 피부에 좋다는 버섯을 잔뜩 넣어 맑은 된장찌개를 끓였다. 하루종일 지쳐 잠든 아내는 그제서야 내려와 나를 안쓰러워했다. 나는 그때 아내의 버섯찌개가 끓기를 기다리며 어머니가 끓여주신 맑은 생선탕을 발라먹으며 소맥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내의 살갗은 처방받은 스테로이드제를 다시 먹으니 단번에 호전되었다. 그래도 약이 독하여 오래 먹을 수 없었고 이 약을 먹는 동안은 임신도 전혀 시도할 수 없다 했다. 오히려 새벽녘부터 내가 화장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맥 마시고 날이 더워 찬 바닥에 배를 붙이고 자서 그런 줄 알았더니만, 잠 못 자고 무리한 몸에 여름철 오래된 생선을 버틸수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종일 앓았고, 퇴근하고 바로 쓰러져 잤다. 아내는 많이 나았고 어머니 아버지가 도와주셨다.
오늘 아침까지 이틀 훈련을 거른 뒤에야 비로소 나도 나았다. 아침에 다시 만난 딸은 제 아비라고 그래도 반가운지 나와 입을 맞추어 압ㅡ빠. 아압ㅡ빠 를 반복했다. 아 이 것이 부모로구나, 이 것이 인연이구나, 이래서 우리는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는구나, 이 것이 사랑이구나, 아내와 나는 서로 어깨를 맞붙이고 아이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