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딸리 만스키, 태양 아래, 폴란드, 2016
그러므로 알뛰세는 강렬히 말하였다.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을 호명하며 투사한다고. 인간이 이념을 만들고 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회에서 자라난 인간들의 몸 끝, 정신의 바닥까지 이념은 젖듯이 뚫듯이 밀려들어오며, 사회의 구성원이 될때 우리는 홀린듯 끌린듯 이념의 부름에 응답한다. "가장 비합리적이며 폭력적인 집단" 인 군대가 유지되며, 또한 독재국가가 유지되고, 불평등이 유지되는 것은, 마치 비트겐슈타인의 게임 규칙처럼, 사회의 이념이 하나의 규칙처럼 강제되어 우리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인들이 '대체 저 사회가 어찌 유지되면, 사람들은 왜 저 사회에 길들여져서 사는 것일까?' 의문을 던져도, 외부에서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내면화된 규칙과 그 언어가 이미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 선생이 전하는 장자의 말처럼, 타자와의 조우가 없는 이상, 그 사회의 내부적 견고함은 무너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비딸리 만스키 감독의 '진정한'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 는 비록 국내외에서 큰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지만, 그 극적인 제작비화로 이미 입소문으로는 널리 알려진 영화이다. ITF태권도를 7년째 하면서 '북한태권도 해요' 라고 해야 더 빨리 타인을 이해시킬 수 있는 이 사회에서, 솔직히 왓챠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폴란드 및 북한 정부의 지원으로 북한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촬영하고자 했던 만스키 감독은, 그러나 '북한의 평범한 가정으로 선정된' 가족이 작위적으로 꾸며졌으며, 그마저도 다큐멘터리가 아닌, 마치 일반 영화처럼, 모든 장면을, 당원의 통제 아래 연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모님의 직장 및 거주지역은 모두 바뀌었고, 남한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보기에 진수성찬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밥상조차 그들은 제대로 먹지조차 못한다. 당원들의 지시에 따라 주변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같은 대사를 여러번 반복해야 하고, 와다 하루키가 '특공대 국가' '인전대 국가' 라고까지 칭한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장면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만스키 감독은 목숨을 걸고 그 가짜 연출의 장면까지 모두 필름에 담아 '태양 아래' 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태양 아래, 의 태양이 과연 모든 것을 굽어보는 자연적인 태양일지, 혹은 김씨 체제의 '태양' 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북한 정부는 만스키 감독을 극렬히 비난하는 입장문을 발표했고, 심지어 주인공 진미의 입을 빌어 '꼭 한번 다시 뵙고 싶으니 북한에 와 달라' 는 초청까지 한다. 이미 소련 치하에서 리얼 소셜리즘Real Sociailism의 폐해를 겪은 만스키 감독은 '나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며 일언지하에 그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아내는 마음이 아프다며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나는 담담하게 영화를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영화 말미에서 끝내 울고 마는 진미를 보며 나도 슬펐다. 다만, 이 영화에서 정말 마음에 울렸던 연출은, 진미 가족을 비롯한 여러 노동자들이, 당의 연출에 따라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할 때, 감독은 북한 사회의 곳곳을 구석구석 보여준다. 당의 지시와 노동자의 대사는, 그에 따라 공허하게 북한 사회의 곳곳에 울려펴지듯 겹쳐진다. 결국, 어느 사회나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은 드물다. 정치를 배제하는 행위조차 정치라면, 이념을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 또한 이념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연코 절대적인 자유는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자연 을 말했고,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외쳤었다. 지금 우리가 돌아갈 곳은 과연 있을까. 만약 지금 내 앞에 한 사람의 탈북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개인으로 대해야 할까, 사회의 적으로 대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