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강신주, 노자 혹은 장자, 오월의 봄, 2014

by Aner병문

일전에 그 유명한 김용옥 선생의 태권도 철학과 구성원리, 를 감평하면서, '태권도' 라고 하는 열쇠 단어 하나를 통해 엮을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엮어낸 그 방대한 지식량에 대해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었고, 한편으로는 무리한 전개 아닌가 하는 우려를 담기도 했었다. 요컨대 태권도의 틀/품새에 비해 맞서기/겨루기 에서 사용되는 기술이 서로 괴리된다는 지적은 서늘하도록 정확하지만, 개신교의 성령/율법 과 불교의 선종/교종 등에 빗대어 이 차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시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가 EBS에서 유명세를 얻을 무렵, 노자와 21세기에서 여러 번 주장하는, 도덕경이야말로 양생과 고수의 비결을 담은 책이라는 대해서는 (비록 내 공부가 얕아서 그럴 수 있겠으나) 지나친 과대해석이라고 생각할 도리밖에 없다. 본디 고문(古文)이란, 유실된 내용도 많고 그 주석도 방대해서, 여러 사람의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다, 해석자가 하나의 입장을 견지하여 그 글을 끝까지 읽어내놓자면, 본 의도와 달리 해석자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읽다보면 제아무리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라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부분도 있다. 강신주 선생의 이번 책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보였다.



강신주 선생의 초기 저작 두 권을 하나로 엮은 이 책에 대해 간략하게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노자와 장자는 흔히 말하는 '노장사상' 으로 엮일 수 있는, 같은 맥락의 도학자가 아니다.

2) 노자의 도는 이미 전제되어 있고, 고정적으로 만들어져 따라야 하는 규범으로서의 개념이다.

3) 장자의 도는 주체와 타인이 서로 조우하며 생겨나는, 소통 간의 방식을 의미하며 따라서 후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그 도도 다르다.

4) 노자의 도는 그저 소국과민의 배경에서 안분지족, 무위자연하며 사는 소극적이고 탈피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은 국민을 다스리고자 하는 위정자의 지배 이론이다.

5) 노자도 장자도 그 동안 필자(강신주 선생 본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곡해하여 대중적인 이미지가 이만큼 퍼진거다.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으며 확인하시면 더 좋을 터이다. 여하튼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답게, 노자 해석에 비하면 장자 해석이 훨씬 세밀하고 나름의 이론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의 1부에 해당하는 노자 해석은 다소 실망스러웠는데, 사실상 사회주의적, 제국주의적 시각과 이른바 텍스트Text를 가지고 도덕경 오천글자를 대별하여 해석하자면 그런 해석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이다. 강신주 선생의 설명은 일관적이며, 도덕경에서 말하는 '약한 것' 이 왜 국민인지, 왜 약한 것을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구절이, 결국 국가를 유지하는 제국의 논리가 되는지 에 대한 설명까지는 크게 무리가 없다. 적어도 '음, 그렇게 볼수도 있겠군' 이라는, 그럴듯한 느낌까지는 준다. 문제는 노자의 삶이라든가, 다른 외부적 글을 통하여 그 설명의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 대신 근현대의 다른 이론을 가져와서 동어반복을 해버리니, '그래, 동일한 이야기가 서양 현대에도 내려오고 있는 건 알겠어, 근데 본론으로 돌아와 왜 노자의 해석이 그렇게 되는건데?' 가 해소되지 않으니, 결국 '그렇게도 읽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 제시했을뿐, 그럴듯한 느낌 이상의 무엇이 없다. 그러므로 성마르기 이를데 없는 강신주 선생의 글치고는 드물게 설득력이 없다.



반면 장자 해석은 훨씬 흥미있고 재미나게 읽었다. 나는 한때 유학(儒學)을 전공하며 가능한 많은 글과 연구자료를 읽기는 했으나, 도가에 관한 글은 학창시절이나 혹은 취미 삼아 현재 조금씩 읽은 게 전부이다. 그러므로 강신주 선생의 장자 해석은 신선하고 즐거웠다. 적어도 내 한계를 깨는 자극이 있었다. 특히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조삼모사의 비유라든가, 포정해우-포정이 소를 잡는 일화의 새로운 해석 등은 앞서 예로 들은 노자의 해석과 달리 훨씬 설득력이 있어 나조차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을 들자면, 강신주 선생은 그 유명한 해체의 권위자 데리다와 장자를 대별하면서, 장자는 타자와의 조우를 전제로 하는 철학자였고, 그러므로 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변화해야할 주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철학자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문제는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주체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체 A가 타자 B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B 역시 그 입장에서 주체 A를 만났을때는, 본인 또한 주체가 되어 타자를 위해 변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는 일방적인 한 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강신주 선생이 해석한 장자는 한 방향의 소통만을 강조하며, 따라서 타자를 위해 변화할 주체도 1명으로 고정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두 주체가 서로 만나게 될때 쌍방향의 변화가 이루어지며 두 주체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심히 아쉽다. 대붕과 곤으로 변해야할 '나' 는 어디에 있는가?



강신주 선생의 책은 언제나 밑줄을 좍좍 그어가며 읽는 재미가 있다. 내가 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찌든 사회 이외의 자유를 책장 사이에서 무한하게 느끼게 해준다. 나 같은 무명소졸도 천하제일의 학식을 쌓은 이를, 내 멋대로 이 좁은 공간에서 비판해보기도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평생토록 짜릿한 일이다. 다음에 읽을 책들이 또 쌓였다. 한 서너 달, 두꺼운 책과 도복과 속옷을 지고 다니느라 무거웠는데, 이번엔 좀 얇은 책을 지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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