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한차현, 늙은이들의 가든파티, 강 출판사, 2021.

by Aner병문

차현 형님과 독자와 작가 이전에 애주가로서 인연은 적지 않으나, 이 감평에는 그러한 인연을 배제하고 썼음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경칭을 생략하고, 한차현 소설가로 호칭합니다. 약간의 내용 언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소설가 한차현의 매력을 꼽으라 하면, 뭐니뭐니해도 마치 능란한 주짓떼로의 경기 운영과도 같은, 능청스러운 서사다. 오래 전, 그를 처음 알게 된 영광전당포살인사건, 그 작품부터 그랬다. 지금도 한차현 소설가는, 그 얘기를 하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멋쩍어하지만, 군대 시절, 북두의 권 전질을 주문했더니, 서비스라면서, 완충재처럼 몇 권의 소설책을 상자의 네 면마다 둘러치듯 넣어주었는데, 그 중 한 권이 그 유명한(?) 영광전당포살인사건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넓적하고, 두터운 책의 양장이 완충재 역할을 하고도 남았었으나, 그 내용은 더욱 좋았다. 마치 근대와 전근대 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냐 논란이 심하듯, 일반문학과 쟝르문학(이런 단어가 있는가 싶기도 하다.) 을 나누는 기준이 있는가 싶기도 하겠으나, 하여간 내가 처음 읽은 한차현은, 도대체가 타격기가 전문인지, 관절기가 전문인지 알 수 없는 격투가처럼, 이 서사 저 서사를 넘나드는 능청스러운 지닌 작가였다. 나는 꾸준히 그의 글을 읽었으며, 그때마다 나는 그가 꾀는듯이 서사로 흘러들어가서 늘 내가 한차현을 읽고 있구나, 그의 소설을 읽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흠뻑 받았다. 마치 내가 교회에 있구나, 내가 태권도를 하고 있구나, 내가 술을 마시고 있구나, 라는 매 순간의 절절한 감정을 벼락처럼 받아들이듯이.



그리고 그가 신작을 내었다. 늙은이들의 가든파티, 란다. 생경한 제목과 달리, 그가 차용한 소재는 사실 고금동서 누구나 한두번씩, 적어도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 이후만 꼽아도 숱하게 쓰여왔던 익숙한 소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혼과 육체- 뇌와 육체- 자의식과 육체의 관계를 늘 고민하는 이유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가 피투성(被投性) - 물론 우리가 피로 범벅되어 태어나긴 하지만, 그렇게 피로 범벅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의 존재, 즉 자의없이 세상에 던져지듯이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존재를 증거할 수 있는 이론은, 아무리 많되 정확치는 않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의 말처럼, 아주 작은 원자들의 만남과 그 유전 정보가 우리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위대한 우연과 기적을 통해 계승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내가 교회에서 늘 배우듯, 혹은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듯, 단지 나만이 모르는 필연으로 이루어졌는지 사실 아무도 모른다. 늘 존재를 향유함에도, 우리는 존재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단지 유지되는 순간을 살 뿐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분명히 아는 삶의 시작을 선택하고, 심지어 그 새로운 시작의 그릇까지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점은, 더할나위없는 욕망일 터이다. 한차현의 소설도 바로 그렇게 시작한다.



한차현의 소설은 하나같이, 호기심으로 시작한다. 피투성의 주인공들은, 늘 떠밀리듯, 서사 위의 조각배처럼 흘러간다. 여러 타인들과의 교우를 통해 비로소 본인의 위치를 깨닫고, 서사의 한 자락을 잡아,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배경이 배경인만큼, 이번 소설에서는 유독, 주인공은 자기가 누군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며, 심지어 제 의지대로 행동하는 일도 거의 없다.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매번 세상이 내 편이길 바라는' 현실의 필부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소설 내내 자기가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며, 결정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변 환경은, 그의 몸과 마음을 둘러싸고 끝없는 욕망을 투영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진정 옳다. 이 소설은, 하나의 '전리품' 을 둘러싼, 자신의 삶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늙은이들의 가든파티다. 뷔페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르는 나 스스로처럼(그렇다, 나는 피로연의 기본은 육회와 초밥이 듬뿍 있는 뷔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탐하는 늙은 하이에나처럼 도사린다. 세상이 힘들다. 내 다른 일기에서 썼듯이, 누구도 위험을 무릅쓸 마음도 없고, 그런다한들 만화 속 주인공처럼 재기하기 어려운 절벽 같은 세상이므로, 사람들은 무슨무슨 코인에 제 지갑 속 돈을 엮어두고, 대선 후보의 이름따라 주식을 사며, 심지어 방송국조차 거짓말을 꿰뚫고, 사실을 맞힌 무속인들을 모아다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달라 한다. 이렇게 힘든 세상이므로, 우리는 모두 가든파티를 꿈꾼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고, 늙은이들은 가든파티에서 젊은 삶을 꿈꾼다면, 소설가 한차현은 과연 다음에는 무엇을 꿈꾸는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