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위 증즐가 태평성대인 시절이 얼마나 있었을까.

by Aner병문

아내가 아이를 보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새에, 요즘 일이 힘들어 연일 식탐이 늘어서 그런지 아침 저녁을 모두 빵으로 때웠다. 연이틀 들른 동네 빵집(우리 부부는 동네에서 편하게 갈 작은 빵집 한두 개는 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싼 빵집보다 늘 동네 빵집을 선호하는 편이다. 동네 빵집에서 만들어주는 고로케와 옛날식 햄버거, 팥빙수는 진짜 못참지..ㅋㅋ) 에서 중년의 여사장님이 진저리를 치시기에 무슨 일인가 여쭈니, 가끔 주변을 돌아다니며 꽁초 주워다 피우는 노숙인이 가련해보여 빵 몇 번 주었더니, 이제는 씻지도 않은 추레한 행색으로 마스크도 없이 빵집으로 들어와 빵을 달라고 행패라며 힘들어하신다. 아닌게 아니라 꾀죄죄한 행색의 중년 사내가 이 추위에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이, 주워핀 꽁초를 뻑뻑 빨며 슬금슬금 주변을 계속 걷고 있다. 슬쩍 그 사내를 바라보며 문을 열고 나가는 자세를 취하려니, 아니나다를까, 벌써 사라졌다. 아마 다시 돌아오긴 할테지만, 오늘은 더는 안 올테다. 사장님은 고맙다고 빵 몇 개 더 담아주셨다. 음, 이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하여간 내가 신길 근처에서 월급쟁이 까페 사장 노릇을 할때에도, 여의도를 건너온 노숙인들이 돈 안 주면 안 나간다고 강짜를 부린 적도 많았고, 종로에서 거리에 주저앉아 새우깡에 소주를 마실 때에도, 역시 몇몇 노숙인들이 자기들도 한 병 사달라고 조르던 적도 많았다. 가난은 모두를 슬프게 하고, 가끔은 부끄러움도 잊게 한다. 나도 배곯던 시절, 부끄러운 일 많이 해봐서 안다. 꽁술이면 누구든 가서 얻어마셨고, 커피가 없어서 방향제용 커피 가루를 가져다 내려마셨고, 공부한다는 주제에 손가락 자르는 심정으로, 수없이 읽었던 책들만 골라 팔아 술값을 만들기도 했다. 이상재 선생의 조부는 밥은 굶어도 손자 읽을 책은 사왔다는데, 역시 나는 범부도 안되는 졸부라 어째 거꾸로다.



하기사 어찌 그뿐이랴. 저 싫다고 자리를 피한 사람을 기어이 쫓아가 죽여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때우려는 세상이 되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시절부터 세상이 살기 힘들어지면 자연재해도 기승을 부리는데, 훗날 역사책에 기록될 듯한 시대에 살다보니, 사람이 살기 힘들어 세상도 더욱 팍팍해지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알 도리가 없다. 후세 사람들은 알려나. 정권은 분명히 바뀌어야 할테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과연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고, 설사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온갖 자연재해며 역병이 과연 수그러들지도 알 수 없다. 정말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옛 성인이 말하기를, 일하고 밥 먹고 자느라,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지조차 모르면 비로소 좋은 나라라고 했다. 제 한 끼를 벌어먹지 못해 기꺼이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사내부터 누군가를 속이고 죽이는 이뿐 아니라, 심지어 나라의 큰 비밀을 감추느라 속엣말 못하고 옥상에서 몸을 던진 고위 정치인도 벌써 몇이나 된다. 이런 나라에서는 나같은 일개 필부조차 먹물 좀 먹었답시고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정치에 기어이 깨작깨작 몇 마디 말을 올려놓게 된다. 어지럽고 가당찮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들여다볼작시면, 항시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하나같이 내실을 다스리고 무(武)를 바로 갖추고자 했다. 정책적으로는 봉쇄국수(封鎖國粹)하거나 개국혁신코자 하려는, 마치 요즘으로 치면 진보냐 보수냐(진보와 보수의 올바른 뜻대로 이 나라의 정당들이 활동하는지는 모르겠으나)로 갈리는 흐름은 있었을 터이나, 적어도 국방에 있어서는 하나같이 강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양무운동을 통해 권법과 총기술을 장려했고, 조선에서도 서양식 총포술을 익힌 별기군을 두었으며, 제일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조차 갖가지 유술, 가라테가 분파를 두어 뻗어나가게 되었다. 꼭 유학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아도, 한 가정을 이루는 일과 나라를 대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러므로 비루할지언정, 한 가정의 가장인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무공과 배움으로도, 이 풍파를 잘 헤쳐나갈 수 있기를 그저 바랄뿐이다. 벌써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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