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백일을 보내며, 술 이야기.
가족들과 함께 소소히 아이의 백일맞이를 하다보니 의도치 않게(?) 좋은 안주로 술을 사흘 연이어 마시는 호사를 누리었다. 하루는 아내가 생고기를 먹고 싶다셔서, 하루는 백일 본맞이로 장인께서 와인을 가져오셔서, 또 하루는 기왕 빌린 백일상이 아까우니 사진을 이래저래 더 찍자고 또 부모님이 오시고, 동생 생일 겸하여 또 한 잔 마시었다. 역시 애주가로 이름을 날린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마냥, 한 잔 마시고 또 마시고, 꽃 꺾어 셈하가며 무진무진 마시었다. 사실 나는 술을 좋아할 뿐 옛 장군호한마냥 말술로 들이키는 사람은 아니지만 술 못 하는 아내 입장에서 보자면 요즘 말로 어마무시하게 술고래란다. 아내는 집안행사로 마시는 술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늘상 마시던 반주는 엄하게 금하고, 밖에서의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하시며, 내가 술잔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면, 아이고 주여, 우리 남편이 또다른 주를 섬기려 하오니, 많이 혼내켜주세요, 장난스레 같이 기도를 하곤 한다.
탈무드에 보면, 술에는 악마의 선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조금씩 판본은 다르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노아가 포도주를 담그려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악마가 와서 자신에게 술을 좀 나누어준다면 포도나무가 잘 자라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노아가 승낙하자 악마는 양과 원숭이와 사자와 돼지를 잡아다 그 피를 번갈아가며 뿌렸다. 그래서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면 처음에는 양처럼 온순해지다가, 원숭이처럼 춤을 추며 흥겨워하고, 나중에는 사자처럼 화를 내며 시비를 걸고, 마지막은 돼지처럼 토하고 뒹굴며 추해진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왔다. 법화경에서는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끝내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말한다.
빅토르 위고는 신은 물을 내렸는데,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 라고 말했다. 술처럼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음료도 드물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술에 만약 이름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 이름을 악마라고 붙였을 거라고 말했다. 윈스턴 처칠은, 술이 내게 빼앗아간 것보다, 준 것이 훨씬 많다며 격찬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배앓이가 잦으면 포도주를 약하게 타서 마시라고 권하기도 하고, 집회서에는 술을 적당히 마셔 정욕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정약용은, 술의 취흥이란 어디까지나 입술만 살짝 적시어 그 맛을 즐기고, 은은히 취하는데 있지, 뱃속으로 바로 털어넣는 자들은 소와 같아 술맛을 모르는 이들이라고 놀렸다. 반면 앞서 말한 정철과 손순효는 시대는 달라도 모두 각자 모시던 왕이 친히 내린 은잔으로 하루 석 잔만 마시라는 어명을 받을 정도로 대주가이자 애주가였는데, 그 은잔을 얇게 두드려 펴서 양푼만한게 만든 다음 일일삼배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전해져내려온다. 세종 다음 가는 성군으로 평가받는 성종은 손순효를 탓하지 않고 '과인의 옹졸한 배포 또한 경이 두드려 넓혀주시오' 라고 말씀하시고, 훗날 의심 많은 암군으로 평가받던 선조조차 정철의 재치에는 웃어 넘길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모르는 사람까지 끌고 와 손님대접 명목으로 아내에게 술 석 잔을 겨우 허가받아 마셨다는 '제비골 선생' 연암 박지원의 고사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술 얘기를 하자면 끝도 없다. 여하튼 술을 좋아한다. 6살 유치원 때 물인 줄 알고 마셨던 종이컵의 소주가 하도 써서, 난 절대 술을 마시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던 십대 시절은, 달콤한 스무살의 첫 술잔과 함께 멀리멀리 날아가버리었다. 북촌 시절에는 그 유명한 엿장수 왕 선생님께 조그마한 술병을 선물받아 서양 배우마냥 수시로 홀짝였고, 인사동 시절에 막걸리 반주는 늘상 기본이었으며, 손님들이 마시다 남긴 술도 척척 잘 마셨고, 결혼 선물로는 도장 사매가 손수 담근 야관문주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무슨 애주가를 넘어 술고래 같다. 그러나 단지 술을 좋아할뿐이다. 술은 기분 좋게 마셔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아플 땐 몸을 쓰지 술잔을 들지 아니한다. 나이 서른이 넘어 이제는 술맛, 말맛 아는 벗들과 조촐히 마시는 술이 참 좋다. 아이 백일을 맞아 이번달은 매주 약속이 있다. 역시 우리 딸이 효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