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조금씩 읽고 있다.
나는 원래부터 타고난 무골(武骨) 이나 강골이 아님을 알았기에, 젊었을 적 나는 한때 종합격투기에 몰두했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관절기부터 타격기, 와술기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망라하는 수많은 기술의 체계 중 몇 개는 내 몸에 맞을만한 필살의 기술들이 있겠지 싶었던 게다. 종합격투만 한 것이 아니라 중국 무공, 권투, 주짓수, 합기도, 택견 등 하여간 좁은 분야의 무공도 아끼지 않고 기웃거렸던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좋은 사범님을 모시고 ITF만 8년째 체계적으로 익히고 있으나, 아무리 다른 좋은 지도자들이 잘 알려주셨어도 내 스스로 욕심에 빠져 이 기술 저 기술 체계없이 주워 배우기만 해서는 내 몸에 뿌리 내리듯 잘 쌓이거나 배이지 않았다. 결국 현재 내 무공은 태권도가 그렇게 깊지도 않은데다, 다른 사람이 어떤 기술을 쓰면, 아, 어떤 무공을 익히셨군요, 분간이나 겨우 하는 정도다.
무공보다 훨씬 먼저 시작한 내 독서나 공부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전문적인 과학이나 기술 책, 그리고 취향에 맞지 않은 이른바 '자기계발' 서적을 제외하면 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순수문학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교차해가며 사십년 가까이 읽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이든 감상을 나누거나 몇 마디 두드려놓는 일도 즐긴다. 그러므로 지금도 늘 하루에 한 단락씩 강신주 선생의 저작을 신구판 나누어 읽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그나마 태권도마냥 내가 가장 오래 읽었던 유학(儒學)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가질 수 있을까, 왜 나는 아직 유학을 고집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곽선생의 말마따나, 과학 기술이 극적으로 발전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실 철학의 많은 분야는 과학이나 심리학, 정신의학, 기술 분과 등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다. 패러다임을 말했던 토마스 쿤이나 하부구조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달라진다고 보았던 맑스처럼, 철학 역시 단계별로 차근차근 쌓이고 깊어지는 학문이 아닌, 어쩌면 협소한 과거의 한 시대에서나 통용되었던 제한된 패러다임일지도 모르겠다. 유학은 원래 정치학이었으며, 또한 윤리학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있는 한, 어떤 시대가 와도 유학은 분명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으로 나는 공부하고 있다. 곽선생이 늘 고루하다고 비판하는 리와 기에 대한 설명도, 윤리학으로 국한시켜 설명하면 교육과 연결되어 제법 낭만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갈수록 격변하는 이 사회에서 과연 유학뿐만 아니라 공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왜 공부하는 걸까? 오늘 아침 문득 도장 향하는 버스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