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

ITF 928일차 - 다시 한번, 사범님의 무게를 느끼던 태권도의 날

by Aner병문

사범님의 급하신 일정으로 정규 수련 요일인 월/수를 대행해보니, 사형제 사자매들의 자유 수련을 도와드리던 화/목 과는 과연 무게가 달랐다. 모처럼 가진 술자리에서 콜라 사매는 자유수련을 혼자 맡던 자신의 화/목이 그렇게 힘들었는데 부사범님은 오죽했겠냐며 소주에 한숨을 섞어마셨다. 내가 사범님의 발목에도 못 따라가겠구나 느끼던 그 때에, 우리 귀여운 콜라 사매도, 이 키 작고 배 나오고 머리 헐벗어진 부사범을 따라가기엔 아직 힘들겠구나 조금 느낀 모양이었다. 사실 신체 능력이나 기술은 명백히 초단 승단을 앞두고 있는 콜라 사매가 더 좋고, 나야 끽해야 단이 좀 더 높고, 몇 가지 기술을 더 알며, 손수 몸 망가져가며 깨달은 몇 가지의 경험 정도가 더 있을 뿐이지만, 아직 어린 처녀에게는 다 보이지 않을 법하다. 그러나 조만간 내 얕은 무공의 깊이는 곧 이 젊고 재능있는 사매에게 들키고 말 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태권도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하는 이만이 도복을 입고 띠를 매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 때가 곧 올 터이다.


그건 그렇다치더라도, 돈 주고 기술과 정신을 배우러 오는 이들에게 허울 좋은 이상론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틀 동안 나는 참 열심히 많이 준비했다. 칠레에서 온 개브리엘라의 유급자 틀을 바로잡아주었고, 유급자 사제들의 움직임을 알려주고, 새로 입문한 흰 띠 사제들을 조금 돌봐드리는 순으로 돌고 나면 서너 시간이 후딱 갔다. 안 그래도 집에 가면 아내가 혼자 딸을 돌보느라 힘들고, 회사도 회사대로 일이 적지 않아 나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라도 많이 늦어지면, 그만큼 부담이 생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 세 겹의 맷돌에 갈리듯이 힘들다고 느낄 떄가 많았다. 그냥 맘 편하게 태권도를 하면서 몸과 마음의 부담을 없앴으면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짬짬이 술을 마셨다.



연습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사제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을만큼은 유지하도록 노력했고, 나는 야밤에 옥상에서 자주 연습했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좋아졌다는 평들이 많았다. 어차피 우리는 각자 과정은 다르겠지만, 수준에 맞게 나름의 봉우리를 올라갔다가, 나이를 먹으며 천천히 내려와야될 이들이다. 그러므로 심판 교육과 지도자 교육, 또 있을 시범단 훈련 등 다양한 각도의 태권도 훈련을 통해 나는, 태권도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달라야 한다는 점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콜라 사매와 햄버거 사매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듯이, 내가 만약 사범님처럼, 아무 연고없이 정말 혼자서 ITF를 해야겠다고 결심할수 있을까, 나는 자신할 수 없었다. 아니 못했을 터이다. 나는 그나마 사범님이 계셔서 이런저런 무공들을 만지던 버릇을 걷어치우고, 오로지 태권도만 익히도록 뛰어들었다. 사범님이 계셔서 터를 마련해주셨고, 나의 잡스러운 무공은 겨우 기초를 다졌으며, 이 기초를 우직하게 다지는 과정이 내 30대부터의 삶을 새롭게 전환하도록 만들어주었다.


4월 11일은 태권도라는 명칭이 제정된 날로, ITF에서 태권도의 날로 정해둔 날이기도 하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지정된 9월 4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하는 WT와는 차이가 있다. 나는 늘 그렇듯 조촐히 케잌을 준비했고, 사범님은 늦은 밤까지 남은 사형제 사자매들에게 간단하게 ITF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주셨다. 어느덧 파카를 훌렁 벗어야할 정도로 짧은 봄이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오며, 우리는 같은 도복을 입고 또 한 해 더욱 뜨겁게 매진할터이다. 정말로 늘 애쓰고 있다. 아무리 삶이 지난하고 고난하고 힘들어도, 태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끄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