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나는 술을 좋아한다.

by Aner병문

아내와 함께 아내의 여고 동창 집들이에 초대받아 울산으로 내려갔을 때, 아내도 나도 당연히 집들이니까 부부가 다 계실거고, 그럼 나는 그 집 부군이랑 같이 술이나 한 잔 하고 있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낮에 처가에 들러 회에 소주 한 잔, 가볍게 두세 병 하고, 아내의 차를 타고 다시 울산으로 넘어가서, 젊은 울산댁들은 뭘 주려나,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웬걸, 가풍이 달라서인지, 일단 부군은 아가씨들끼리 재미있게 놀라며 청소만 해주고 진작에 자리를 비웠다 하고, 아내의 여고 동창들만 올망졸망 모여 앉아 십자가 아래에서 커피 한잔씩 마시며 수다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심방 분위기... 커피 한잔 훌렁 마시고, 슬쩍 '여그는 뭐 한잔 마실 술 없소?' 하자 아내의 여고 동창인 작은 울산댁은(먼저 결혼한 큰 울산댁이 또 따로 있음) '우짜지요, 여기는 교회 다니는 집이라 술이 없는데예.' ...음, 그러면 서울가면 교회 청년회장인 나는 어째야 됩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보자니 대부분 결혼한 아내의 동창들은 슬슬 시댁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내가 옆에 있어봐야 굳이 아내도 속편히 이야기도 못할 것 같고 하여 나는 일단 자리를 피해주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미안해했으나,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누구 잘못도 아니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KTX를 좀 더 빠르게 조절할까 했으나, KTX로 오는 울산은 사실상 초행이나 다름없었고, 젊은 시절, 멋모르고 울산역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가, 또 시내까지 버스 타고 한 시간 더 들어가는 고생을 했던 신산한 기억만이 남았을 뿐이다. KTX로 울산에서 안양까지 오려면, 태화강 역에서 신경주까지 온 다음, 다시 신경주에서 또 노선을 갈아타야 했기에 도저히 아내가 신경써서 연달아 두 번씩 이어도록 맞춰준 차 시간표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 듯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아내에게 다시 카카오톡을 보내어 동창 집 근처의 선술집에서 책 읽으며 술이나 한 잔하고 있을터이니, 차 시간 다 될 때쯤 되거든 나를 데리러 오라 언질을 두었다.



아내의 동창 집 앞에는 호젓하고 그럴듯한 술집이 하나 있었다. 지역 소주부터 찾으니 '여기는 참 마신다, 참.' 하며 주방에서 칼을 씻던 여사장님이 참 소주를 꺼내주었다. 요즘은 닭모래집을 소금과 후추로만 간하여 볶아주는 집이 많이 없어지고, 무엇이든 땡초와 매운 양념을 잔뜩 넣어 속을 달구기 일쑤이므로, 때마침 닭모래집 소금구이가 있기에 나는 그를 주문했었다. 사장님이 생양파와 마늘을 썰어 고추를 조금만 넣고 쫄깃한 닭모매리집을 달달 볶아내는 동안, 나는 '삼팔선 이남에서 제일로 눈이 높다는 울산 처녀들의 부모와 그 부모 밑에서 자라 씀씀이가 호방하여 다른 지역 남자들은 함부로 데려갈 수 없는 울산 처녀들' 에 관한 이아기를 들었다. 어디까지나 한 울산 어머님의 개인적 의견이겠지만, 지역과 환경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포항이 그렇듯, 울산 역시 오랫동안 현대 중공업이 자리하여, 울산의 부모님들은 아들 사위는 기본적으로 당연히 대기업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라 당연히 씀씀이에 아쉬움이 없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전라도라서 대부분 밥 잘 먹고 풍족하게 지낸듯하나, 어머니는 다 그렇지도 않다며 '아이고야, 시집가기 전에 처녀가 한 말 밥 먹고 가믄 많이 묵고 간다는 집도 있고잉, 을매나 찢어지게 가난헌지 친정 어매가 찾아와도 웬수같다는 집도 있다잉, 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여.' 하는 말씀도 해주셨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닭모래집 앞에서 소주를 자작하자, 어지간히 자신의 딸 자랑을 했던 울산 사장님은 '아니, 보이까네 말투도 지역도 언캉 다른데이 여 신랑은 와 혼자 여서 술 먹노. 마느래는 어디 갔는데?' 물어보시어 '동창들끼리 편하게 먹고 자븐거 같아서 나는 여그서 그냥 한잔 허지요, 아따 맛있겄네.' 하고 나는 가져왔던 조현 선생의 책을 펴고,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게 읽었고, 누가 보건말건 오뎅탕도 하나 더 주문해서 속을 풀며 또 한 병 마셨다. 혼자서 술 마시는 일은 썩 좋아하지 않았으나, 모르는 동네에서 낯선 이와 생경한 곳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시는 술은 마치 제가 류근 시인이라도 된 양 그럴듯하고 좋았다.



내 생일을 미리 당겨 하기로 해서, 너는 미역국이라도 끓여놓겠다며, 언니도 보고 싶다고 아내와 함께 찾아오라 일렀다. 내심 주말을 쉴 수 없다면 야간 근무라도 배정되길 바랐는데, 또 이럴 때는 일요일, 즉 오늘이 오전 출근이었다. 그래도 잘 되었다 싶어 아내와 함께 염천에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가로질러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염치불구하고 실컷 이야기하고 먹고 마셨다. 중래향 사장님은 장송 술을 새로 들였다며 내게 한번 맛 보라 권하시었는데, 38도 적당한 도수에 목넘김이 부드러웠고, 향도 풍부했다. 아내는 일찍이 손을 들었고,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뭘 입에 넣는 습관이 있는 나는, 그날도 너의 집에서 염치불구 염이불괴 후안무치하도록 먹고 마셨다. 너가 끓여준 미역국을 후루룩 마셨을때, 훗날 나의 딸이 이렇게 끓여줄 미역국을 당겨 마시는가 하여 나는 괜시리 마음 한 켠이 울렁울렁 울컥거렸다. 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을때 술을 마시고, 마시는 술자리마다 기억에 남을만한 결들이 있다. 명분이 있어 너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너를 보고 싶어서 명분을 만든다. 너는 내게 몇 남지 않은 소중한 벗이다. 같이 술 한잔을 하기에 더없이 편안하다. 너는 그날 짙은 파란색 원피스를 허리부터 졸라입었는데, 마치 한 송이 파초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아 혼자 술잔 들고 속으로 웃고 말았다. 아내와 늦지 않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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