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생일 - 늘 벗들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날.

by Aner병문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은 늘그막에 독립 운동을 하시느라 만리타국에서 험한 타지 생활을 하시면서도 특유의 재치를 잃지 않으셨다. 인터넷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선생의 이른바 '드립' 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 후기 해학과 만담으로도 유명했던 수동 정지윤- 통칭 정수동을 생각나게도 한다. 개화파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박정양의 식객으로도 있을때도 그러했거니와 말년에 제자들을 만날 때에도 항시 '내가 오늘 생일이노라' 하여 한 상 거하게 얻어먹는 일을 즐겼다 하시는데, 젊은 날 그를 거두어 먹였던 박정양도 그렇고, 말년의 제자들 역시 무슨 생일이 1년에 몇 번씩 되느냐 반문하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며 껄껄 웃으신 적도 있다 하고, 또 제자들에게 '야 이놈들아, 사람이 살아 있으면 그 날이 곧 생일 아니냐' 하며 말문이 막히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시다. 여튼저튼 아내와 나 역시 생일이 딱 앞뒤로 8일 차이가 난다.



일전에 너가 은근히 귀띔하기를, '언니는 고향 떠나 혼자 애 키우면서 지내는데, 전 선생님 너무 선물 많이 받았다고 들뜨지 마. 언니 안쓰럽다.' 하기에 늘 그 말을 새기고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내 선물이 꽤 많이 들어왔다. 하기사 한 주에 이틀, 도장 하루에 4시간 꼬박꼬박 보내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하여 사범님을 비롯한 도장 사형제 사자매들이 주로 아내가 좋아하는 케잌과 치킨을 많이 보냈고, 그 외에는 처가에서 책 한 질(드디어 맹꽁이 서당 15권을 완비했다!!) , 너의 미역국과 명분 어린 술상, 중균 사범님께서 손수 그리신 액자 하나, 아내의 보드게임 하나, 밥잘하는 유진이의 술상 및 디즈니+ 아이디 공유, 그 외에는 주 4일 연속 술자리와 그리고 두 사매가 보낸 병 주고 약 주고 세트- 소주 한 병이 다 들어간다는 커다란 소주잔 2개의 비타민이 웃겼다. 아니, 어데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내가 무슨 송강 정철이라고 소주 한 병이 다 들어가는 커다란 잔에다 술을 마실까 ㅋㅋ 게다가 약은 왜 챙긴거야 ㅋㅋㅋ 어찌 되었건 안주 바꿔가며 주 4일 연속으로 술을 마셔대었는데, 아무리 이것저것 좋았어도 역시 4일째쯤 되니까 아이고, 술이고 뭐고 잠이나 한숨 잤으면 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 인연이 참으로 소중하다 새삼 느끼던 순간이었다. 가뜩이나 사람 하나 연락이 끊기니 그 허전함이 은근히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는 사람 속 헤아리기 어렵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나와 아내를 위해서 그 더운 날에 감자탕과 미역국을 끓이고, 고기 완자를 구워주고, 얼음잔에 술을 타주었다. 아내를 생각해서 너는 술기운이 잔뜩 오른 내게 더 술을 마시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내는 아마 너에게 점수를 많이 주었을 터이다. 아내는 내 생일을 앞두고 오랜 고향 친구와 날을 세울 일이 좀 있어 나조차도 기분이 불쾌했는데, 그 때 너는 내게 따로 연락해서, 아내가 눈물을 비치고 기운이 빠져 있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 않다면서, 이번엔 언니 친구 해주고 싶다고, 그래서 언니가 좋아하는 물건을 말해주면 보내주겠다 했다. 하여 아내는 지금 너가 선물해준 하얀 가방을 잘 메고 돌아다닌다. 아가씨 마음은 아가씨가 안다고, 너가 골라준 가방은 아내의 큰 키에 참 잘 어울렸다. 나는 이십대의 여리고 날카롭던 너가 어느틈에 더욱 깊고 조용해져서, 먼저 아내의 친구를 해주고 싶다 말해주는 그 적극성에 새삼 놀랐고, 또한 감동받았다. 벗이란, 술과 더불어 오래 될수록 맛이 드는 모양이다.


도장 식구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선물을 많이 보내어 고맙고 미안했다. 나는 하루 종일 연락을 받았고, 아내는 나더러 '마이너들의 인싸' 라고 해서 내가 웃고 말았다. 아내는 늘 내게 '세상에 격투기 중에서도 ITF태권도가 뭔지 아는 사람, 한국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보드게임도 글코, 여보야가 읽는 책들은 다 어려워가 뭐 누가 좋아하는강, 만화책도 옛날 만화책만 좋아하고, 마이너 아잉교, 마이너.' 하면서 놀리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아따, 그런 마이너하고 살 붙이고 가시버시로 사는 사람은 뭐여 그럼?' 하자 아내는 헤헤 웃으면서 '뭐긴 뭐겠능교, 내도 마이너지.' 하면서 깔깔 웃었다. 아내는 대체적으로 커다란 술잔 2개와, 그리고 자정까지 놀다간 밥 잘하는 유진이의 산토리 위스키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물에 감사했다. 이미 양꼬치집에서 고량주 두어 병이 얼굴이 잔뜩 붉어진 밥 잘하는 유진이와 내가 얼음잔에 토닉워터를 채우고, 그 유명한 거북이 모양의 산토리 위스키 병을 따서 꼴꼴꼴 잔으로 붓는 소리에 '크~' 하면서 둘이 넘어가자 '요요요 술꾼들, 요 술꾼들을 우짜꼬?' 하면서 웃고 말았다. 중래향 사장님은, 원래 예순 넘은 어른들부터 받는 음식이라곤 했지만, 창쑤미엔을 한번도 안 먹어봤다면 만들어주겠다 하면서, 무엇인가 했더니 한자로는 장수면 이라고 썼고, 닭육수에 쫄깃한 면을 말아내고, 그 위에 부부끼리 사이좋게 나눠먹으라고 수란을 하나씩 띄운 온면이었다. 수란은 2개를 띄운 이유가 있는데, 부부가 오면 부부끼리, 또 고부가 오면 남자들은 주지 말고 사이좋게 여자들끼리 하나씩 나눠먹으라 준다 한다. 달걀 하나는 동그라니 이쁘게 잘 나왔고, 나머지 하나는 노른자가 살짝 치우쳐 찌그러지고 못생겼는데, 사장님은 예쁜 달걀은 아내 접시에 떠주고, 나머지 하나는 내게 미시면서 '하나는 마누라 주고, 이 못생긴건 치엔 시엔셩 거지, 치엔 시엔셩 아무리 태권도 해도, 그래 술 먹고 다니고 건강 조심하오!' 하며 엄포를 놓으셨다. 아이고 무서워라... 여하튼 처음으로 먹어본 장수면은, 쫄깃하고 구수하고 맛있었다. 술 취한 다른 손님들이, 왜 저 젊은 사람만 만들어주냐고 눈총을 주시는 듯하여 잠자코 얼른 먹었다.



아주 풍족하게는 못 살아도, 처자식을 모시고 이렇게 살고 있다. 올해의 생일도 이렇게 지나갔다. 늘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고민 없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