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다. 그래서 선택한 히비스커스차. 새빨간 것이 독약을 마시는 기분이다. 내겐 너무 새콤하지만 몸에 좋다니 그 향을 즐기기로 한다. 캔커피를 처음 마신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도 대학때 캔커피를 마신 게 처음이었을 것이다. 남자 동기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건넸다. 다른 학교에 여자친구가 있는 동기였는데 그 친구가 날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선배들은 내가 남자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과 선배를 사귀었지만 연애가 즐겁지도 않았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정말 그 선배를 좋아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허허벌판에 지어진 학교는 너무 추웠고 캔커피는 너무 소중했다. 졸업을 하고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별로 좋은 추억이 없었다. 모든 것이 어긋나기만 했고 나는 졸업하는 해 여름, 영화사에 취직해 학점만 채우고 졸업을 했다.
때로 차 한잔이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나를 이끈다. 사진작가였던 친구와 홍차전문점에 가서 얼그레이를 마시던 날, 인도여행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친구는 뇌출혈로 몇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인도에서 머시는 짜이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진하고 달콤쌉싸름한 추억. 500원이 채 안되는 가격에 아침이고 저녁이고 한잔씩 마시며 먼지 가득한 인도의 거리를 배회했다. 한국에서는 짜이를 파는 곳이 별로 없었다. 요즘엔 공차라는 카페가 생겨 비슷한 맛을 느낄 수 있지만 몇년전만해도 커피나 홍차였다. 언젠가 김 작가와 줌으로 미팅을 하는데 그녀는 늘 그렇듯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밤 12시가 넘은 그 시각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보며 놀라는 것이었다. 커피는 우리병에 금기되는 음료였기 때문이다. 김작가는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술보다 커피가 해롭다니 이상한 논리지만 의사들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잊을 수 없는 커피는 뭐니뭐니해도 그대가 보내준 에이스 커피일 것이다. 도무지 내가 어딨는지 어떻게 알고 그걸 보냈는지 나로선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대와 소통을 하기 전 그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나와 소통하려 했었다. 내겐 무척 낯선 경험이었는데도 난 마치 그럴 줄 알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대가 보내 준 커피를 마셨던가 아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때는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뒤죽박죽이었다. 도무지 그대가 나한테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나는 사실 아직도 모든게 나만의 착각 같을 때가 있다. 처음엔 정말 그런 줄 알았으니까. 가을이 되니 커피를 더 자주 찾게 되고 약간의 우울감도 느껴진다. 훌쩍 혼자 떠날 수 있었던 젊은 날처럼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