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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an 02. 2022

차가운 북구의 따듯한 서정

울라브 하우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차가운 북구의 따듯한 서정


울빅 © 11tylermartin, 출처 Unsplash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

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

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

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져오듯


- 울라브 하우게,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종이로 된 신문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모든 아름다운 사연에는 항상 '어느 날의 우연히'가 꼭 뒤따르더라. 클리셰처럼... 진부하더라도 꼭 필요한 요소처럼.


상사가 내게 지시하고, 해결하길 바라는 일의 무게가 유독 버겁고 힘이 들던, 일에 대한 회의감과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으로 내가 발 디디고 서있는 지구가 휘청일 것 같은 그런 어느 날, 눈에 보이지 않는 비전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시행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실행 가능하도록 수립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과를 손에 잡히도록 예측해야 하는 숱한 반복 속에서 누군가 나에게 괜찮다, 괜찮다 위로해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는 그런 날, 나는 아주 우연하게 회의 탁자에 펼쳐진 어떤 종이 신문에서 그를 만났다... 아니, 발견했다.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 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


아... 상사에게 듣는 말이었다면 얼마나 황홀했을까. 사랑하는 연인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겠지만 상사에게 듣고 싶은 제일의 말은 뭐니 뭐니 해도 '그 정도면 됐어(That's enough)'가 아닐까. ㅎㅎㅎ 하지만, 그날 내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더라면 그의 시가 내 눈에 유독 반짝거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의 이름을 확인한다.


'울라브 하우게'


퇴근 후 자세히 검색하기 위해 나는 머릿속에 발음하기도 낯선 그의 이름을 꾹꾹 담아 저장한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시인의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인터넷으로 주문했고, 그의 시처럼 순백의 하얀 표지를 가진 예쁜 시집이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그리고 또 읽었다. 그 후로 그의 시집은 내가 애정하는 시집 리스트에서 항상 상위권에 올라와 있다. 캐나다로 먼저 짐을 부칠 때에도 그의 시집은 한국에 남아 있다가 내 백팩에 담겨 함께 비행기를 탔다. 그냥 마음이 헛헛해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카롱을 하나 집어 들 때처럼 나는 영혼에 당분이 필요할 때 그의 시를 집어 든다.


울라브 하우게의 시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나는 어떤 음악을 꺼내 들을까 잠시 고민해 본다. 여행의 최고의 동반자는 바로 음악이니까. 추운 나라인 노르웨이로 떠날 예정이니 따듯한 노래가 필요하다. 그래! 김동률, '그게 나야'를 시작으로 그의 음악을 플리(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이제 홀로 여행길을 떠나 본다. 눈밭을 걸어야 하니 스틱과 등산화는 필수다.



우리가 나르는 것은 꿈이라오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꿈

일어나야 한다는 꿈

시간이 열리고

문들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꿈

땅이 열려 물이 솟고

꿈도 열리는 꿈

그런 꿈들을 싣고 어느 아침처럼

미지의 항구로 들어서는 꿈



- 울라브 하우게, '꿈'-



노르웨이의 국민시인인 울라브 하우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1908년 농부의 아들로 울 빅(Ulvik)에서 태어났지만 1994년 의자에 앉은 채 10일간 단식하며 의지를 가지고 죽었다.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는 충분히 살았고,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운명에 맡기거나 육체에 맡기지 않고 그저 선택했을 뿐이다.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스스로 걸어야 한다

모르는 곳으로

먼 길이다


길은 그런 것

오직 스스로

걸어야 한다 길은

돌아올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었는지

남기 마라

지나간 처음의 길은

바람이 지우리


- 울라브 하우게, '길'-



그가 태어난 울 빅은 빙하로 생긴 피오르 해안 지대로 천 명 정도가 사는 작은 동네라고 한다. 8살, 10살, 12살에 차례로 그의 형과 누이가 죽은 후 그는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곳에서 여러 차례 전기 충격을 겪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고통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책을 만나게 된다. 몇 달간 600권의 책을 읽었고 특히 그 가운데서 그를 구원해줄 시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 속에는 존재가 지니는 고통과 그 고통을 견디는 품위가 있다.



꽃노래는 많으니

나는 가시를 노래합니다.

뿌리도 노래합니다 -

뿌리가

여윈 소녀의 손처럼

얼마나 바위를 열심히

붙잡고 있는지요


- 울라브 하우게, '야생 장미'-




© skamenar, 출처 Unsplash


정신병원을 나온 하우게는 1928년 원예학교에서 원예를 공부한 후 평생 울 빅의 고향마을 과수원의 농부로 살며 시를 쓴다. 1927년 19세의 나이에 신문에 시를 발표했던 시인은 38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첫 시집 『재 안의 불씨』(1946)를 펴냈다. 그는 일곱 권의 시집과 낭송시집, 번역시집, 서간집, 아동 도서를 출간했다. 15세부터 죽기 전까지 쓴 방대한 분량의 일기가 출간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4천 페이지가 넘는 노르웨이 사상 최대 분량의 문학적 일기로 통한다(yes 24, 작가 소개 인용)


부지런한 농부처럼 시를 썼던 그는(400여 편의 시를 썼다) 정원사이기도 했기에 자연과 자연을 마주한 한 인간 사이의 다사로운 교감이 그에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연의 감정을 읽는 농부이자 시인이었으나, 자신이 돌보는 자연을 수확해야 하는 직업인이기도 했기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슬픔을 잔잔하게 노래하기도 한다.



긴 낫에

늙은 몸 의지한다

풀밭

낫이

조용히 노래한다

내 마음 혼란스러워라

괜찮아요

풀들이 말한다


- 울라브 하우게, '긴 낫' -



때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기도 한다.

© fabulu75, 출처 Unsplash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 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 울라브 하우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위로해 줄 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는 정원사처럼 그저 그의 눈을 조금이나마 털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과 운명이 우리에게 건네는 고통을 우리는 막을 수 없다. 다만, 그 고통을 같이 목격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때가 있지 않은가. 또 누군가가 내게 내리는 눈을 막아주지 않더라도, 그저 눈 내리는 정원에서 같이 있어주며 슬픔을 견디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해주길 바란다. 네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정도는 누구나 견디며 산다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내 등을 두드려주고, 내 슬픈 눈망울을 가만 들여다 봐주기만 해도 위로가 되지 않던가.



여름은 추웠고 비가 많았다

사과가 푸르고 시다

그래도 사과를 따고 고른다

상자에 담아 저장한다

푸른 사과가

없는 사과보다 낫다

이곳은 북위 61도이다


- 울라브 하우게, '푸른 사과'-



작물을 키우기 어려운 차가운 북구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철학과 사상, 종교, 과학이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었을까. 그저 실존하기 위한 삶의 고단함과 단순함 속에서 오히려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시인은 22세에 만나 함께 살았던 카펫 예술가 부딜 카펠렌과 70세에 결혼한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지는 검색으로도 확인할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시 속에서 살펴 보건대 그의 부인은 시인의 삶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 같다. 부인의 존재로 시인은 꿈을 꾸고, 기도하고, 때로 추위를 이겨냈고, 배고픔도 이겨냈고, 다른 세상으로 떠날 수도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부딜, 나를 위해 카펫을 짜줘

꿈과 비전으로

바람으로

나도 베두인처럼 기도할 때

그것을 펼치게

둘둘 말아 덮고 자게

그리고 매일 아침 외치게

'아침을 차려다오!'

추운 겨울에는 망토로 입게

돛으로 쓰게

어느 날 나는 카펫에 앉을 거야

그리고 멀리 항해를 나갈 거야

다른 세계로.


- 울라브 하우게, '카펫'-



앞서 언급했듯 시인은 의지를 가지고 자연사한다. 이는 오래된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나는 이 방식이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닐까 싶다. 그런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면서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몹시 궁금하다. 시인의 노래처럼 마음이 말을 그치는 그때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적절한 때이련가...



이제 내 마음이 말을 그친다

파도도 그치고

독수리들이 다시 날아간다

발톱이 피로 물든 채


- 울라브 하우게, '이제 내 마음이 말을 그친다'-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중고등학생이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시가 꽤 많이 읽혔다. 그때의 시들은 서정성으로 인해 지금 기준으로 조금은 유치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의 시 트렌드가 오히려 시와 대중을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신춘문예에 입상하거나 상을 받은 시들을 읽어 오면서, 과연 이 시를, 시를 오래 써온 시인들 외에 대중들이 즐겁게 읽어줄까 의문이 든다. 운율이 중시되고 서정미가 가득했던 서정시는 이제 문단에서는 적어도 주류가 아닌 것 같다. 산문시의 홍수 속에서 여전히 서정시를 좋아하는 내가 트렌드에 따르지 못하는 독자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희곡작가이자 배우이자 시인이었으니.

그런데 그의 시는 너무 쉬워서

현관에 놓인 나막신처럼

바로 신으면 되었지.


- 울라브 하우게,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러나 난, 여전히 읽히는 시를 읽는다. 읽히지 않는 시는 읽히지 않아 읽지 않는 것일 뿐이다. 시가 그저 읽는 이의 허를 찌르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면 산문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시는 노래하는 문학이다. 운율이 사라진, 서정성이 사라진 지금, 나는 더더욱 울라브 하우게와 같은 서정시를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하우게의 말처럼 '나막신'처럼 신으면 되는 시가 많이 나와 다시 대중들이 시를 읽는 시절이 되면 좋겠다. 낭만보다 효율이 중시되는 세상에 사는 일은 오아시스를 가리키는 이정표만 난무하는 사막에 서 있는 어린아이처럼 막막하기도, 또 조금 외롭기도 하다. 그래서 대양보다는 당장 마실 물 한 모금이 더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시집 뒷면에 실린 시인의 생전의 모습


하우게 시인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워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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