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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Dec 23. 2021

빗 속에서 피 흘리는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하)

https://brunch.co.kr/@anessdue/129


지난번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소개한 날이 11월 7일이더군요. 발행한지 한달 반이 넘어가도록 후속 이야기를 마무리짓지 못해 혹시나 제 글을 기다리고 계셨을 독자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제 기형도 시인의 이야기를 두번째 글로써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래 기다려주신 분들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중략)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중략)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 입속의 검은잎 중 <오래된 서적> -



기형도 시인의 시 <오래된 서적>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이었는지, 그래서 그가 또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여린 영혼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어릴적 가난으로 시인의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누나들은 공장에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입속의 검은잎 중 <엄마 걱정> -



총명했던 누나들은 그를 위해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가장인 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있었지요. 심지어 자신의 바로 위 누나는 어린 나이에 공장을 다니다 죽었습니다. 그런 누이를 위해 쓴 시가 <나리 나리 개나리> 입니다. 절절하고 사무쳐서 눈물이 나는 시입니다.



....(중략)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 입속의 검은 잎 중 <나리 나리 개나리> -



그는 학교에서 상을 받아도 그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장을 강물에 띄워 보내기도 합니다. 그 어린 시절을 그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 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그런 개인적인 불행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였습니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었던 불우한 어린시절은 그의 영혼에 '검은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우울과 상처가 내면 깊이 자리잡은 청년은 자라서 '기적을 믿지 않는' 회의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그의 청춘에도 사랑이 있었건만 그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나 봅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입속의 검은잎 중 <빈 집> -



김기덕 감독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인 <빈 집>을 읽노라면 실연을 노래한 그 어느 글보다 훨씬 쓰라린, 깊은 상실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이 되어 나는 '잘 있거라' 인사하지만, 쉽게 떠나 보낸 것이 아닌 깊은 절망감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맙니다.


고은 시인은 자신의 시집 <순간의 꽃>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라고 사랑을 정의한 바 있습니다. 사랑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따듯한 집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인 것이지요. 그래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 집>에서 두 주인공이 죽은 사람의 빈 집에 찾아 들어가 함께 밥을 차려 먹는 모습이 나옵니다. 기형도 시인이 사랑을 잃은 자신의 상태를 홀로 '빈 집에 갇혔네' 라고 표현한 것과 모두 일맥상통하지요.


© FlashBuddy, 출처 Pixabay


자신의 불행을 잘 아는 사람은 다른 이의 불행에도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시련에 울었었던 눈이 고운 사람'은 믿지만, 인스타그램에 행복한 일상만을 전시하는 사람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자신의 불행에 천착해 자기 내면만을 바라보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시를 쓰면서도 기자가 된 이유는 적어도 자신만의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걸 세상 밖으로 알리고 싶은 자신만의 화해의 몸짓이었다고 봅니다. 불행으로 단절과 분리를 겪어야 했던 세상과 자신의 자아를 그는 직업으로 이어붙이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인이 바라 본 세상은 어떤 곳이었까요.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중략)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중략)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어갈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 입속의 검은잎 중 <죽은 구름>-


시인은 개인에게, 불행에 처한 개인에게는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낍니다. 죽은 노숙인을 그는 '죽은 구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치부하고, 심지어 늙은 개 조차 죽은 그의 접시를 노리며 서성입니다. 하지만 시적 화자죽은 이도 한때 생각을 하고, 욕망이 있던 한 인간이었음을, 그리고 그는 그저 틀에 박힌 생활을 넘어선 자신만의 자유를 갖던 사람일 수도 있음을, 그러니 노숙자라고 한들 함부러 그를 판단하고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신만의 담담한 화법으로 노래합니다.


입속의 검은입 중 <기억할 만한 가르침>


지나가던 길, 울고 있는 하위직 공무원(서기)을 그는 우연히 발견합니다. 기자였기에 그는 관공서에 출입이 비교적 수월했을 것입니다. 눈이 많이 내려 건물 조차 흰 서류뭉치처럼 보이던 어느 날,  어떤 슬픔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나 한 사람이 울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를 위해 잠시 기다려줍니다. 다가가서 위로해 줄 수는 없지만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아무말 없이 기다려 줍니다. 그리고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회상합니다.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만치도 자상한 자기만의 위로가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의 위로는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로는 활자로 인쇄되어 영원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커다란 공간에서 홀로 눈물을 흘릴 세상의 모든 타인들을 그는 이렇게 위로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지요. 글의 위대함은 이런데서 생겨난다고 봅니다.


빈집에서 죽은 노숙인과, 관공서에서 울고 있는 어느 한 타인에게는 이해와 위로를 건네는 시인이지만 사회를 좀 먹는 집단에 대해서는 꽤 냉담하게 비판합니다. 자신만의 상아탑을 쌓아가는 소위 전문가들의 모순, 자신들만의 이론만을 고집하고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는 독선을 마치 하나의 우화처럼 이야기하며 꼬집고 있습니다.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 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 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 입속의 검은잎 중 <전문가>-



깨지기 쉬운 유리창, 진짜 빛이 아닌 반사된 빛으로 자신을 빛내는 유리창 같은 사이비 전문가들이 지금도 얼마나 판을 치고 있는지요.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고, '전문가가 자신의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는 대목에서 조금 소름이 돋았습니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일수록 유독 반짝거리지요.


사기꾼을 만나 그에 도취되는 대중들의 우매함을 노래한 시도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쉽게 믿고 홀리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지요. 신이 코로나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분의 이야기를 듣고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과 '맹신'은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시인은 '맹신'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입속의 검은 잎 중 <홀린 사람> -



마지막으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시의 배경은 아마도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아닐까 싶어요. 아니면 그 시절에 자주 발생했던 크고 작은 민주화 운동의 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장례식' 이라는 싯구로 1987년 6월, 전경의 최루탄에 쓰러져 사망한 이한열 군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연세대 재학중이었던 그는 최루탄에 맞고 27일 후 눈을 감게 됩니다. 그의 사고와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시민들의 분노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6월 항쟁이 되었고 결국 전두환 군사정권은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게 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에 대한 깊은 침묵을 고수한 채 올해 11월 23일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광주시민들에게 사과를 하였더라면, 진심어린 속죄를 하였더라면 역사의 검은 페이지가 조금은 희어졌을거란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가 길지만, 전문을 모두 적어 보겠습니다.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입속의 검은 잎> -


시적 화자는 두 가지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억압으로 죽음이 중계되는 수상한 시절, 믿을 수 없는 어떤 택시에 타고 있어 자신도 잘못 이야기하면 끌려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혹은 자연인으로서 민주화 열사의 죽음을 떳떳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비겁함에서 오는 스스로의 공포. 그러한 재갈-억압을 화자는 입속의 검은 잎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하 수상하던 시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스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에게 우리는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그렇게 만든 제공자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의 시가 1980년대에 쓰였다는 걸 감안하면 시가 참으로 세련되었다는 느낌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어떤 한 청년이 방금 쓴 시 같습니다. 시인은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시에는 그 시절의 현대인도 지금의 현대인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가 봅니다.


그의 시 제목도 감각적이고 멋진다는 인상을 주지요. 그래서일까요. 그의 시를 영화 제목으로 차용한 작품이 여럿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기덕 감독의 <빈집(2004)>,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1994)>,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2002)>,  그리고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 가 그렇습니다. 모두 시집이 나온 이후 발표된 작품들이니 기형도 시인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다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시가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은 쉽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는 잘 읽힙니다. 가끔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으로 읽어야 하는 시가 있습니다. 그런 시 가운데에도 해석하는 즐거움을 주는 시도 분명 있지만, 저는 시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기사든 쉽게 쓰인 글을 가장 최고로 칩니다. 문장이 모여 개성이 생기는 것이지, 어렵고 난해한 (보르헤스나 프루스트 식의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표현이 개성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성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정서와 사상과 관련되는 것이지 화려한 미사여구나 쓸데없이 비비꼰 문체가 아니라고 봅니다.


기형도의 시는 순수시와 참여시의 중간 즈음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불어 넣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시 전체에 투영됩니다. 시를 읽고 있노라면 외로움, 쓸쓸함, 검은색 또는 회색, 축축하고 눅눅함, 비와 진눈깨비, 차가운 강물 같은 이미지가 저절로 연상됩니다. 그만의 이런 개성과 분위기 때문에 저는 쉽게 그의 시를 그림(1편에서 언급한 프란시스 베이컨과 마크 로드코)으로, 또 음악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그의 시는 제게, 읽는 즐거움 이상의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뮤즈가 되어줍니다.


기형도 시인과 비슷한 예술가가 한명 더 있습니다. 바로 유재하이지요. 그는 이문세에게 <그대와 영원히>라는 유명한 곡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유작으로 남은 단 하나의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남긴 천재 작곡가이자 스물여덟에 요절한 안타까운 가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의 모든 곡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특별히 <별 헤는 밤>을 듣노라면 자연스럽게 기형도 시인이 떠오릅니다. 


피아니스트 김광민과 유재하(김광민은 유재하를 추모하며 '지구에서 쓴 편지'라는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곡을 만들었다)


20대에 읽었던 기형도의 시는 그저 아프고, 눈물나고, 시렵고, 서러웠지만 시인보다 더 나이를 먹은 40대가 되고보니 춥게만 보이는 그의 영혼을 따듯하게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시인의 시집 뒷편에서 비평가 김현은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라는 부제로 해설을 하였습니다. 저 역시 기형도 시인에게 <별 헤는 밤>을 불러주며 자신은 춥고 어두웠을지언정, 누구의 말대로 그로테스크한 자화상 같은 시를 썼을 지언정, 내게는 그 어떤 시보다 따듯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제게 '시의 첫사랑'이자 '청년 기형도', 그리고 '불멸의 연인'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유재하의 별 헤는 밤) https://www.youtube.com/watch?v=BPQ6epatKxQ




시집의 좌표는 여기서 확인하세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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