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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Nov 07. 2021

빗 속에서 피 흘리는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상)

아....기형도, 기형도, 기형도오오오....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기형도 시인을 처음 만난건(정확히는 그의 시집을) 20여년 전 대학시절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저는 지금보다 100배는 더 예민하고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끔은 그때의 불안의 정서가 그립기는 합니다. 아름다우면서 서슬퍼런 감성적인 글은 그 시절에나 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브런치에 보이는 20대의 젊은 작가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저는 왜 40대에 들어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참...그래도 지금이라도 시작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감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만난 그 사람은 제 마음에 그냥 눈물도 아닌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시집은 유작으로 단 한권만 있을 뿐입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뇌졸증으로 어느 극장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1960년 3월 13일, 옹진군 연평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물고기자리에 태어난 사람들은 예술가가 될 수 밖에 없는 기질을 타고난다고 하는데 기형도 시인의 직업은 기자였습니다. 10살이던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족들의 생계를 어머니 홀로 짊어 지어야 했고, 1974년에는 공장에 다니던 누나가 죽게 됩니다. 누나의 죽음으로 년 기형도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기형도 (1960-1989)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청년 기형도는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하여 연세대학교 학보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하였다가 공안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1983년 '식목제'로 <연세춘추>가 시상하는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졸업 전인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문학사상, 현대문학, 한국문학과 같은 문학지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위키피디아 기형도 편 참조)


그리고 1989년 종로의 파고다 영화관에서 심야영화를 보다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해 지인들이 그의 시작 노트에서 유고 시들을 모아 낸 시집이 바로 <입 속의 검은잎> 이지요. 시집의 제목은 당시의 평론가였던 김현이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시집의 제목에서부터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검은 잎은 죽은 이파리입니다. 망자의 입에 저승길의 노잣돈으로 엽전을 넣어 주었듯이 죽음에 이른 시적 화자의 입에 검은 잎을 넣은 것이지요. 실제로 시인은 망자이기도 했지요.

그래서일까요. <입 속의 검은잎>이라는 제목은 제게 늘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를 연상시킵니다.  시인은 평소 혈압이 높아 자신이 오래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


시집을 출간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서인지 기형도 시인의 시는 곧 기형도 그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삶이 그다지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시에 대한 그의 인터뷰 조차도 있을리가 없습니다. 시인이 오래 오래 살았더라면 자신의 삶이나 가치관을 글이나 인터뷰로 많이 보여주었을 텐데 시인은 오직 시만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에서 그의 컨텍스트를 유추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시인이 시 그 자체로 여겨집니다.


<입 속의 검은잎>이라는 시집은 제게 시각적, 청각적으로 몇가지 강렬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곤 합니다. 제가 읽고 해석한 시적 화자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한 미술 작품을 몇년전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 누워있는 인물 제 3번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현대미술가의 작품인데요. 시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혹은 시인 자체이기도 하지요)는 그림처럼 자의건 타의건 어둡고 음습하고 눅눅한 동굴같은 방속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두운 영혼을 통해 어두운 도시, 어두운 사회, 어두운 현상들을 예리하고 예민하게 포착하고 관찰하고 또 그를 노래하지요.
(참고로 베이컨의 작품은 무척 음산하고 괴기하고 무서우니 임산부나 심신미약자는 절대 보지 마시길 권합니다)


유고시집에 참여한 평론가 김현 역시도 그의 작품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김현은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고 평한 바 있지요.


저렇게 어둡고 음울한 화자가 노래하는 시의 느낌은 마크 로드코라는 현대화가의 작품처럼 피 냄새가 납니다. 사실 시 자체를 읽고 보면 오히려 담담한 어조라던가 냉소도 느껴지는데 전 이상하게 시에서 강렬한 피흘림 같은걸 느낍니다.
 

마크 로드코, 무제


로드코의 이 작품 외에도 그의 다른 작품들도 전체적으로 훑어 보면 정말 시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로드코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요. 이 작품을 보면서 팔뚝을 칼로 그어 떨어지는 핏방울들을 감상하며 죽었습니다)

아래 링크 확인하시면 로드코의 작품들을 훓어 보실 수 있어요.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document_srl=3656789&mid=Art2



서론이 좀 길었는데요. 작가의 詩作메모로 본격적인 그의 시 세계로 떠나 보겠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 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詩作 메모(1988.11)



메모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방황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방황은 눈이 되어 흩날립니다. 그 눈은 안타깝게도 세찬 바람에 밀려 지상에 안착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쓸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방황과 쓸쓸한 고독을 아름다운 눈처럼 시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또한 차가운 겨울이 지나가면 눈은 눈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앉으리라 염원합니다.

시인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이 반영된 시는 지금도 살아 시를 읽는 저와 같은 사람의 영혼에 스며들어 불멸의 것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예언가의 또다른 페르소나 인걸까요....  


옹진군에 있는 기형도 시인의 어린시절 생가


대학 시절에는  '조치원'이라는 시를 무심코 지나치듯 읽었습니다. 제가 몇년전 2년간 조치원에 살았기도 했지만 30대 후반이 되어 다시 읽은 이 시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었지요.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도 그 감정은 여전합니다. 시가 이토록 따듯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 시를 통해 처음 느꼈습니다.


이 시는 한편의 단편소설처럼 읽혀집니다. 조치원이 고향인 한 사내가 서울에서의 삶에 또다시 실패하고 고향인 조치원으로 향하고 있지요(굵은 글씨가 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 사내는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하지요.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



그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적 화자인 나는 생각합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하지만 나는 또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



그 사내가 드디어 조치원역에서 내리는 모습을 나는 조용히 지켜 봅니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 <입 속의 검은잎> 중에서 '조치원' -


아...정말 따듯합니다. 쓸쓸하고 적막한 야간 열차 안, 피곤함으로 졸고 있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시적 화자는 우연히 자신의 옆에 앉게 된 어떤 사내로부터 그 사내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사내는 비록 서울살이에 실패하여 낙향하고 있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실패한 이에게 돌을 던지지 말것을, 그 실패에 대해 변명하여도 그저 이해해 줄것을, 누구나 겨울을 위해 한개쯤의 외투를 갖고 있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내가 다음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예언해 줍니다. 크고 검은 한마리의 새가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고 말입니다.



© jennaanderson, 출처 Unsplash


위의 '조치원'이 한편의 단편소설 같다면 '안개' 라는 시는 장편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시집의 맨 처음에 수록된 '안개' 대학시절부터 무척 좋아했던 시였습니다. 시인은 시에 원래부터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뒤늦게 신춘문예에 이 '안개'라는 시를 통해 등단했는데 그를 잘 아는 지인의 말로는 시인이 일부러 신춘문예용으로 약간은 어설프게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그의 시 중에서 안개는 시인의 의도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지기도 하고 쉽게 읽히기도 합니다.

안개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는 독재 정권일 수도 있고, 고속 성장을 주도하던 80년대 산업화의 어두운 이면 일 수도 있습니다. 메타버스 시대에 안개는 면대면의 관계와 오프라인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소외가 될 수도 있지요.   안개가 은유하는 우울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는 언제나 안개주의보가 발령되었고, 지금도 안개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생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시적 화자는 이 시에서 다소 시니컬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게 더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기도 합니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 <입 속의 검은잎> 중에서 '안개' 일부-


안개가 시대배경이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 즉 현대사회의 무정함과 부조리함은 개인의 불행에 대해 직간접인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시인이 살던 시대는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 인해 부조리함을 극복하려는 시민사회의 연대가 아직은 미흡하기도 했지요. 지금은 그때보다 환경과 복지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의식있는 시민들의 연대가 많이 활성화되어 과거의 짙었던 안개가 많이 걷혀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가리는 안개와 그에 의한 무력감 등이 잘 버무려진 이 '안개'라는 시처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노래한 시인은 '가는 비 온다' 라는 시에서 좀 더 적극성을 가지고 노래합니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런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비.....오는 날,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입 속의 검은잎> 중에서 '가는 비 온다' -



이 시에서 말하는 '가는비'는 안개의 또다른 버젼 같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가는 비....

그러나 시인은 가는 비가 어느순간 거리를 젖게 만들어버리는 숨겨둔 힘을 알고 있습니다. 우산을 쓴 친구는 신경쓰지 말라고 합니다. 문득 古장자연씨와 古성완종씨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거대한 부조리함과 그 부조리함을 생산하고 있는 권력에 짖눌려 결국은 죽음을 선택하며 죽음으로써 사람들에게 그 부조리함을 알리려 하였습니다. 죽음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의 절망을 나는 차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휴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치던 범인도 왠지 같은 맥락에서 측은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소식이 들리더라도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혹은 우산을 쓴 사람들이거나 거위겠죠)은 그저 쯧쯧쯧 혀를 한번 차고는 가는 비....가 언젠가 다시 그치겠지라는....무심함과 무력감에 굴복하고 말지요. 시인은 이런 현대인들의 메마르고 피폐한 정서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관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아....나는 빗방울과 장난 치는 거위에 불과....한 현대인이라는 사실....그 자각 때문에 기형도의 시를 펼치면 마치 피흘리는 서러움에 휩싸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못난 내 모습을 마주하지만,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비'를 막기에는 나는 그저 힘없는 개인일 뿐이라는 스스로의 위안이 방관자라는 우산의 그늘로 숨어버리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영화 홀리데이 스틸컷(2005)


<기형도 시인의 시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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