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잡문집 08화

베그할 때 호강하는 엄마, 나야 나

by 김정은

저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이 '보글보글'이나 '테트리스'를 할 때도 옆에서 구경만 했습니다. 저보다 4살 어린 남동생이 자주 가던 <88 오락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 낼 우유값을 오락으로 탕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씩씩거리며 잡아오던 기억이 여전합니다.


참고로 제 동생은 어릴 때부터 무척 귀엽고 엄청 착해서 단 한 번도 제게 말대꾸하거나 대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깨알 동생 자랑). 저는 오빠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하던 기억이... 누나가 엄청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냐고요? 흠... 진실은 동생만이 알겠지요. 그런 건 굳이 물어보지 않기로 해요. ^^


보글보글 (이미지 출처 http://naver.me/GFnscBbI)
테트리스 (이미지 출처 http://naver.me/FaZeMfEk)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신시티''워크래프트'가 유행이었는데 저는 당최 이걸 왜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수험 공부하기도 벅차서 게임에서까지 전략을 세울 머리가 남아 있지 않았지요.


그렇게 게임에 관한 한 몹시 순수한 뇌를 가지고 대학에 들어왔는데 단짝 친구가 오락실 게임을 좋아하는 겁니다. 친구 따라 강남도 가는데 학교 앞 오락실 정도야 가뿐히 따라갔지요. 그 친구는 특히 비행기 게임을 좋아했는데 주로 '1945'와 '라이덴'을 했어요.


저는 1945가 참 재밌더라고요. 1945는 버전도 다양합니다만 특히 '1945 strikers'가 제일 재밌었지요. 단순한 게임이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남자 동기들은 모두 '스타크래프트'나 '철권'을 했는데 스타크래프트는 익숙해지려면 많은 시간과 돈을 바쳐야 하기에 아예 쳐다보지 않았고 철권은 맞거나 죽을 때 기분이 별로 더라고요.


반면, 1945는 버튼을 눌러 미사일로 적기를 맞추면 되는 아주 심플한 게임입니다. 적이 쏘는 미사일을 피하기 위한 민첩성과 집중력이 요구는 되지만 내가 쏜 미사일에 적기가 맞아 팡팡 폭발할 때 굉장한 쾌감이 있더라고요. 그렇더라도 하루에 딱 한판, 100원만 넣고 한다는 철칙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2년 내내 붙어 다니며 1945를 하니 100원으로 1945 마지막 여덞째 번 판까지 죽지 않고 가는 신공을 세우게 되더라고요. 3학년 때부터 복수전공을 하다 보니 오락 게임을 할 여유가 없어 자연스럽게 게임은 또 멀어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naver.me/5IlfbSdJ)


코로나19가 터지고 아이들과 실외 활동이 어려워지자 남편이 게임기를 검색하기 시작합니다. 가족의 행복과 안녕에 진심인 우리 남편은 아이들이 특히 뭘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고 하면 어느 순간 뚝딱 주문을 해 놓습니다. 우리 집 빌런 역할과 군기반장 담당인 저로써는 가끔 남편을 제재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아주 살짝 화를 낼라 치면 남편은 아이들을 선동해 '마녀가 화가 났다. 빨리 피하자' 라며 화를 아예 못 내게 만들면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마치 사자 머리 위에 올라탄 생쥐처럼 약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저를 잘도 조련하지요.


코로나19가 터지니 남편이 재빠르게 닌텐도를 주문합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이 한동안 닌텐도로 재밌는 시간을 보냈지요. 우리 아이들은 온 가족이 다 같이 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저도 몇 번 게임에 참여했습니다만 게임만 하고 나면 왠지 기진맥진해집니다. 순간적으로 엄청 집중을 해서 그런 건지 어쩐 건지 알 수 없지만 암튼 기가 좀 빨린달까요.

닌텐도에서 제일 재밌었던 마리오 카트(이미지 출처 http://naver.me/55n13PRz)


몇 달간 닌텐도를 하고 나니 아이들 흥미가 좀 떨어지자 남편이 이번에는 VR 게임기를 사잡니다. 이게 고글 같은 걸 쓰면 눈앞에 증강현실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게임을 하는 건데 엄청 재밌다며 말이죠. 그래서 결국 VR 게임기를 샀습니다. 남편이 자기 물건은 잘 못 사는데 애들을 위한 건 잘도 삽니다. 그래서 마음이 짠해져 결국 다 허락해 줍니다. 그런데 이건 좀 재밌더군요. 게임 속에서 높은 건물 위로 올라가면 실제처럼 엄청 무서워 다리가 막 후들거립니다. 거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소리도 엄청 지르게 됩니다. 사실 0.1센티미터도 안 떨어졌는데도요. VR 게임은 실제로 하는 것보다 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100배 더 웃깁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남편이 하는 모습을 항상 흐뭇하게 바라보았죠.


VR 게임중 젤 신나는 비트세이버 (이미지 출처 http://naver.me/FHYiOlou)


캐나다에 도착하고 약 2주일간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저와 남편은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한 결과가 5일 후에 나와서 격리가 해제되었지만 백신을 맞지 않은 12세 이하 어린이들은 공항에서 나올 때 한번 검사하고 8일 후 집에서 추가로 검사를 또 합니다. 검체는 온라인 상으로 담당 공무원의 지시에 따라 수행 후 집 앞에 놓으면 수거해 가는 방법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리고 결과를 또 한참 기다려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집에 티브이도 없는 데다 딱히 할 일이 없던 녀석들에게 격리기간 동안만 핸드폰 무제한 사용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 후 글쎄 이 녀석들이 '베틀 그라운드' , 줄여서 '베그', 장인이 되어 있지 뭡니까.


올해 9살이 된 둘째 녀석은 어릴 때부터 총 마니아라 총종류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에서도 종류별로 총을 모았는데 비행기로 실어올 수 없어서 한국에 두고 왔더니만 안타까웠던 아빠가 베그를 허락해 준 것이지요. 그런데 둘째가 저 보고도 베그를 같이 하자고 3일간 내내 조르는 겁니다. 베그는 100명 정도가 한 게임에 묶여 최후의 1등이 될 때까지 상대편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서바이벌 게임입니다만 실제 해보면 잔인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회사가 만들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1위 게임이라고 하더군요.


베그는 4인이 1조가 되어 게임을 치르기 때문에 아빠와 엄마, 누나까지 온 가족이 함께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핸드폰에 베그 앱을 깔았습니다. 막상 게임 화면을 여니 워낙 복잡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예요. 아이들이 알아서 다 세팅도 해 주고 게임에 시작도 하게 해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르쳐 줍디다...


그렇게 해서 베그를 시작했는데 이건 뭐 움직임 조작도 어색하고 건물에 들어가 총과 각종 보급품을 먼저 획득을 해야 해서 정신이 없더군요. 처음에는 총을 찾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발견되어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두 번째는 운 좋게 총을 획득했지만 한 발도 못 쏴보고 또 죽어요. 한 곳에 머물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나름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어디선가 적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고 나면 영 피곤한데 하루에 한 번씩 둘째 녀석이 베그를 하자는 통에 그렇게 베그를 한지 어느덧 2주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재밌냐고요?

처음에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가다 서바이벌 장소로 낙하를 합니다.(이미지 출처 내 핸드폰)
저는 항상 남편이나 아이들 뒤를 따라갑니다. 앞에 서면 무서워요 ㅜㅜ
베그세상에서는 우리집 막내인 둘째 아들이 운전사에요. 아들이 운전하는 차 타고 댕기면 호강하는 기분

너무 재밌습니다!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승리하는 것이 재밌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한 팀으로 묶여 전장터를 누비는데 베그 세상에서는 제가 가장 모지리인 데다 어리바리라 우리 딸과 아들이 저를 그렇게 든든하게 지켜 줍니다. 아들이 어디선가 차를 구해와서 멀리 떨어진 저를 구하러 달려오기도 하고요. 누군가 제게 총을 쏘면 딸이 얼른 나타나 적을 처치하고 저를 구해줍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게임 속 전장터를 누비면 그렇게 신나고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현실 세상에서는 남편이 저를 지켜주는데 게임 세상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저를 지켜주는 겁니다. 어쩌다 아이들이 먼저 죽고 남편과 단 둘이 전투를 치를 때는 아이들이 사랑하는 부부만 남아 전투를 치른다고 로맨틱하다고 해주더군요. 전쟁에서 싹트는 사랑이라며...


그렇게 4인 가족이 열심히 싸우다 1등을 하기라도 하면 그날은 거의 축제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베그를 계속했더니 가족애에 더불어 전우애가 생깁니다. ㅎㅎㅎ 저도 요새 조금 익숙해졌다고 1 kill(적군 한 명 죽임)도 하고 어쩌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3 kill도 해봤습니다. 그러면 애들이 잘했다고 엄청 칭찬해 줍니다. 어찌나 으쓱하던지요. 그렇게 저는 베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기력이 딸려 하루에 2게임이나 3게임 정도만 하지만 그 정도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즐기고 좋아합니다. 아마도 1945 게임처럼 오래 즐길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캐나다 와서 장금이에 이어 베그 장인이 될 것 같네요 ㅋㅋㅋ


난생 처음 우리팀이 1등한 날. 에이스는 역시 둘째 녀석이 ㅎㅎㅎ


이제 아이들 학교가 개학하여 온라인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캐나다는 1월 2일부터 수업 시작인데 오미크론 때문에 5일에 개학했어요). 처음 경험하는 학교 수업인지라 수업 따라가느라 아이들이나 저나 당분간 전처럼 베그를 즐기지는 못할 것 같아요. 저도 곧 수업이 시작되기도 하고요. 그래도 틈틈이 둘째가 또 베그를 하자고 하면 시원하게 '오케이'를 해줄 예정입니다.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제가 아이들 때문에 게임을 좋아하게 되는 걸 보니 엄마는 참 대단.... 아니... 자식 이기는 부모는 정말 없나 봅... 아니... 베그가 괜히 세계 1위 게임이 아닌가 봅니다. 이상 아이들과 베그 하는 엄마, 작은 나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딸 아들, 엄마는 하늘섬 맵 별로야~넘 금방 죽는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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