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은 May 09. 2022

글 쓰는 자아

생 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어린 왕자를 찾아 헤매는 이유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학교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같은 날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열었다. 대체로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한 5월이나 6월 초순경에 열렸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나는 초등 1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 언제나 그림을 택했지 글짓기를 택한 적은 없었다. 일기 쓰기는 꽤 좋아했지만 누군가가 심사하고 채점하고 순위를 매기는 글짓기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글을 아주 못썼기 때문이다. 글은 잘 썼는지 못 썼는지 명명백백하게 판단되지만 그림은 글에 비해 다소 느슨한 장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글보다는 그림이 훨씬 단점을 가리고 꾸며내는데 유리했다. 선생님들께 내가 별 볼일 없는 학생이라고 드러나는 것이 꽤 겁났던 모양이다.


11살 무렵부터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을 흉내 내서 나만의 이야기를 창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하얀 도화지에 낙서를 하는 오락 이상의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늘 놀이처럼 하는 공상과 상상을 가끔 글로 표현해냈던 것뿐이었고 그것도 몇 번 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중고교생 시절에는 학교 공부와 수험공부 때문에 글 쓰기는 더더욱 멀어져 버렸다. 논술 준비를 위한 글짓기와 일기 외에 그 어떤 이유로든 글 쓰기는 내게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 1호(위)와 2호(아래)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첫 장에는 소설의 주인공(이후 화자라고 칭함)이 어린 시절 그렸던 보아뱀과 어른에 대한 단상이 담겨 있다. 6살에 보았던 밀림에 관한 책에서 영감을 받은 화자는 어린이다운 상상력으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 마치 중절모처럼 생긴 - 의 모습을 그렸지만 어른들 그 누구도 그 그림이 보아뱀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서 보아뱀의 내부 모습을 다시 그려 어른들에게 보여주지만 이런 그림보다는 지리학이나 수학 등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핀잔만 듣게 된다. 이후 어른이 된 화자는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을 흉내 내며 제법 그럴싸한 어른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뜻이 맞을 것 같은 어른에게 보아뱀 그림을 보여주고 자신의 꿈에 대해, 자신의 내면에 대해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아 헤맨다. 물론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진짜 자신의 모습은 적당히 감춘 채 사회 구성원으로서 요구되거나 기대되는 역할을 점점 능숙하게 수행해 나가는 일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요구되던 역할이 본래 나의 욕망이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에는 내 본래적인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괴리감 때문에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때때로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않다 생각하는 세상에 나를 맞춰야 할 때 느낀 무력감과 굴욕감은 두고두고 깊은 상처가 되어 무의식 어딘가에 여전히 깔려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상처가 쌓이면 어느새 용기는 사라지고 세상의 눈치만 보는 쫄보, 겁쟁이 자아만 힘을 쓰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서 나뿐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어린 왕자>가 오랫동안 명작의 반열에 올라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자아를 어른이 되어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인 듯 하다.


파일럿인 화자는 말하는 시점으로부터 6년전 사막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리고 불행이 닥쳐온 그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화자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존재, 자신의 그림을 보고 한눈에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이란 걸 알아챌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화자보다 더 순수한 존재였고 이미 어른이 된 화자는 어린 왕자가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하지만 결국 어린 왕자가 바라던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순수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주인공이 어린 왕자를 위해 그려준 양이 들어 있는 상자


, 정확히는 시와 소설, 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삼십 대 중반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성인이라는 자아의 정점을 찍고 있던 때에 들었다. 아마, 한계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닥 훌륭한 배우가 되지 못한다는걸 인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시절의 나는 과연 내가 바라는 진정한 나로 살아왔는지, 남이 바라는 나로 살아왔는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 보기에)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결혼과 미래를 위해 또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장에 들어갔다. 또 남들에게 나 자신이 꽤 그럴싸해 보이도록 온갖 얕은 지식이나 얄팍한 가치관을 열심히 떠들어댔던 것 같다. 순전히 무언가 있어 보이는, 실제로 무언가 있는 사람으로 남들에게 '판단되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의 가치를 내가 세운 잣대가 아닌 사회와 타인이 세운 잣대에서 평가하여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에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실망하고, 자책하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학대라는 것을 이제야 좀 알게 되었다.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최대한 흠결 없이 처리하기 위해 지샌 숱한 밤의 시간들은 순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지, 가족에 대한 시간은 아니었음을, 내가 애써왔던 수많은 노력들이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게 내세울 명예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는 1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왕자>에 대해 많은 해석과 설명이 있겠지만 어린 왕자는 소설 속 화자의 또 다른 자아상이라는 것이 내 해석이고 결론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욕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존재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종교와 예술을 발명해 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존재의 의미와 정답을 알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고, 그에 대한 수많은 해법을 종교에 담기도 하며, 그것을 갈구하는 욕망이 예술로 발현되는 것이리라. 비슷한 맥락에서 철학이나 심리학, 문화인류학은 인류 전체의 메타인지와 같은 영역이라 볼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구이든, 인류 전체에 대한 연구이든 내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알 수 없다면, 보다 더 현실적인 물음으로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파고드는 것이 이런 학문을 발달시켰다고 생각한다.


거창하게 인류의 시선으로 답을 찾아 헤맨 듯 하지만 거시적인 접근으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의 존재 이유, 아니면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파고드는 본능적인 욕구임과 동시에 잃어버린 나만의 어린 왕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기도 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사회화되어 오면서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내 무의식과 자아의 폐허에 방치되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순수한 자아를, 생 떽쥐베리처럼 조우하고 싶은 것 같다.


혼자 글을 쓸 때는 외롭기도 하 좀... 막연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글은 생각이나 감정의 배설 그 이상이 되지는 못했다. 브런치에서 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글을 읽으며 나처럼 자신만의 어린 왕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불시착한 사막에서 나침반과 지도도 없고, 연료도 없이 그저 헤매는 것만이 능사일 때에 나처럼 방황하는 이들을 하나 둘, 수 십, 수 백 명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사막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의 터전으로 바뀌게 된다.


나는 나의 어린 왕자를 몹시 만나고 싶다. 나만의 보아뱀을 그리고 싶고, 내가 그린 보아뱀을 보여주고 이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맞힐 또 다른 나를 찾고 싶다. 내가 발행하는 모든 글은 내가 그린 보아뱀이다. 타인이 세운 잣대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필요도, 힘도 없다. 나와 비슷하게 순수한 자아를 찾는 이들과의 연대 덕분에 내 안의 글 쓰는 자아가 점점 더 손에 잡히는 기분이다. 내가 정녕 찾고자 하는 순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청년기에 멈춰 버린 영혼의 성장이 글쓰기를 통해 한 뼘 두 뼘 자라고 있음을 느끼는 이상, 글 쓰는 자아는 당분간 글 쓰기를 멈출 것 같지 않다.


글을 두어개 쓰고 나면 늘 저렇게 컵들이 모여있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사막을 배회하느라 목이 많이 말랐나 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