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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ul 06. 2022

세상에는 나쁜 글도 있다

표절에 대한 단상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좋은 글의 기준은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거나 즐거움을 주거나 깨달음을 주는 글이 좋은 글일 것이다.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그 시대의 문학 사조를 이끌고 부흥시키는 글일 것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글은 출판업을 발전시킬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좋은 글은 자아성찰과 자가 회복의 기능이 있다. 신경과학에서 볼 때 글을 쓰면 인간의 두뇌가 훨씬 좋아지고 치매를 예방한다. 언어학적 측면에서 좋은 글은 언어를 유지 발전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일 것이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전까지 세상에는 좋은 글만 있다고 생각했다. 내 기준에서는 재미도 감동도 없는 글일지언정 다른 사람에게는 최고의 글이 될 수도 있다. 황색 저널리즘을 확대하는 글이라고 해도, 언론에서 자기 편의대로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할 지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보다 큰 관점에서 보면 그런 글들을 무턱대고 나쁜 글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브런치에 자주 보이는 험담스러운 글 조차도 당사자에게는 좋지 못한 글이겠으나 글을 쓰는 이에게는 카타르시스(정화) 기능을 부여하기 때문에 작가 자신에게는 좋은 글일 수 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글은 다 좋은 글이다,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브런치와 오마이뉴스에서 몇 달간 글을 발행하고 나니 세상에는 나쁜 글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는 분명히 나쁜 글이 존재한다. 내 기준에서 나쁜 글이란 바로 이런 글이다.


타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되지 않은 글


최근에 표절을 당했다. 오마이뉴스에서 발행한 기사의 2/3 가량을 다른 인터넷 매체에서 그대로 베껴 발행한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복붙(복사하기+붙여 넣기) 수준으로 대담하게 가져다 쓴 걸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해당 매체의 글쓴이는 나처럼 시민기자나 객원기자도 아닌 매체의 정식 기자였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의 저작권은 오마이뉴스에 있기 때문에 매체 쪽에 표절 사실을 알려주었다. 오마이뉴스에서 기사 담당자가 대응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 후에 다시 확인해보니 단어를 약간씩 고치긴 했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대응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되어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다. 영리 목적을 가진 언론 매체에서 다른 매체의 기사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직업인으로서의 안이함과 저널리스트로서의 도덕적 해이가 씁쓸함을 자아낸다.


브런치에서 글을 쓴 지 3주도 채 되지 않던 어느 날, 내 시구 일부를 다른 작가가 자신의 시구에 넣은 것을 발견한 일이 있다. 그 후로도 내가 쓴 표현을 가져다가 교묘하게 바꿔 쓰는 작가들을 더러 보았다. 하지만 이건 심증일 뿐이다. 창작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일 수 있고, 나와 같은 표현을 우연히 같이 생각해냈을 수도 있다. 내가 표절이라고 의심하는 이유는 내 글이 언제나 시기상 앞서 발행되었기 때문이지 내 심증이 아주 확실하다 보기도 실은 애매하다.


다만,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다듬어 만든 시구들인데, 꼭 내 자식 같은 그런 표현들인데, 무엇보다 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표현들인데 며칠 간격으로 비슷한 표현으로 글을 발행한 것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아팠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브런치를 접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시의 경우에는 시를 여러 번 발행 취소했다가도 다시 발행하길 반복했다. 시를 쓰고 싶어 브런치 작가가 되었는데 표절이 두려워 시 쓰기를 포기하는 것은 나 답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영감이 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다만, 표절이 아닌 자신만의 변형으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왕 모방할 거면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보며 습작하길 바란다. 나의 이런 생각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은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캐나다에서 영어 글쓰기를 가르칠 때 교수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표절 금지다. 캐나다에서는 표절을 상당히 중대한 문제로 취급한다. 대학생들이 제출하는 모든 과제와 리포트는 표절을 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시스템에서 모니터링을 한다. 표절의 정도를 15%, 20%, 33% 이런 식으로 정량화하고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표절했는지도 다 나온다. 대학에서 표절이 1회 적발되면 성적이 제로가 된다. 2회가 되면 그 학생의 기록에 남게 되고, 3회가 되면 대학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이는 기록으로 남아 향후 회사에서도 그 여부를 알 수 있게 된다.


최근에 어학원 과제로 발표자료를 제출했는데 발표 용어에 대한 정의를 사이트에서 찾아 가져다 쓰면서 표절이 되지 않기 위해 단어를 바꾸었고 인용 출처도 밝혔다. 표절 시스템에서도 표절로 판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담당 선생이 원작(오리지널)과 같은 단어를 3개 이상 쓰면 무조건 표절이라고 해서 발표자료를 다시 만들어 제출한 적이 있다. 심지어 문장 구조도 바꾸라고 해서 난감했다.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표절에 대한 이들의 엄격한 잣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옛말이 있다. 어차피 문학이든 예술이든 다 모방과 변형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모방할 때에는 레퍼런스를 밝히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아니면 오리지널이 연상되지 않을 만큼 자기만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변형하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이미 출판이 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도 표절하면 안 되는 것이 상식이다. 더군다나 브런치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장이 아닌가. 브런치의 글 대부분은 그저 브런치에서만 발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브런치는 저작권이 썩 잘 보장되는 곳은 아니다. 내 글은 공신력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한 것도 아닌데 노출은 이미 되어 있다. 누군가 글을 그대로 베껴 브런치 아닌 곳에서 글을 내도 파악하기 쉽지도 않을 테다. 표절을 당해도 이곳, 저작권에 취약한 브런치에서 글을 쓴 내 잘못이라고 그냥 치부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못 씁쓸하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모두 글을 쓰는 이들의 선한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이의 글이나 아이디어를 훔쳐서 자신의 글을 쓰는 일은 단순히 훔친 행위 때문에 나쁜 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타락은 자기 자신과의 타협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타인의 글을 훔친 사람은 정작 원작자는 알지 못할 지라도 훔친 자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훔친 글로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글로 혹시라도 등단이나 출판을 하게 되면 더더욱 타인과 스스로를 계속 속여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괴롭겠는가.


좋은 작가가 되려면 단어와 문장의 표현이 비록 자신의 생각만큼 훌륭하지 못하더라도 진실되게 쓰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표절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해는 된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좋은 작가이자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글을 쓰는 자의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러하니까. 하지만 다른 이의 글에서 감동을 받고 영감을 얻을지언정 훔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영화 <베테랑>의 대사로 대신하겠다.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 대신 이승의 쾌락을 좇은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인 괴테의 <파우스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괴테가 악마와의 계약으로 젊어지고 처음 사랑에 빠진 그레트헨이 악마의 모략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아기를 죽이게 된다. 감옥에 갇힌 그녀를 파우스트가 구하려 하지만 그레트헨은 값을 치르겠다며 거절한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외친다. "그녀는 심판받았다!". 그러자 저 위의 하늘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녀는 구원받았다!"


글쓰기란 결국 글쓴이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가란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되어야 한다. 18세의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며 예술은 진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예술을 향한 진실된 추구는 반드시 타인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신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 임윤찬 군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파우스트는 이승에서의 여러 시행착오 끝에 깨달음을 얻고 드디어 자신의 생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네


자기 자신에게 진실되게 글을 쓰려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만이 진정한 자유와 삶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쟁취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누릴 자격은 분명히 얻게 될 것이다.




대문 이미지: Image by Nil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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