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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Feb 09. 2020

외국에서 차 사고를 내다.

엄마도 가끔은 울고 싶은 날이 있단다.


“봐봐. 안 봐도 여자야. 김 여사.”

남편은 답답하게 운전하는 앞차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에 왜 남녀가 필요하냐고 발끈하며 필요 이상으로 앞차의 운전자를 감싸고돌았다. 사실 장롱 안에 고이 모셔둔 나의 운전 면허증은 17년 무사고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운전을 한 기억을 간신히 더듬을 수 있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건 다 할 수 있겠는데, 운전만은 못하겠어.”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그해, 나는 언니와 K운전교습소를 찾았다. 기계공학과에 수학적인 머리가 뛰어났던 언니는 운전 또한 수준급이었다. 선생님이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두 개, 세 개를 응용해내고는 했고, 선생님은 언니를 항상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선생님이 내 옆 좌석에만 앉으면 목소리 데시벨이 급격히 올라가고는 했는데, 베테랑인 그가 내 옆 좌석에서만은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놓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보면, 내 운전 실력은 본투비 왕초보였나보다.     



 

사람마다 발달된 감각영역은 저마다 다르게 존재한다. 수리, 공간 지각 감각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어, 감정 표현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다. 아마도 나라는 사람은 확실하게 후자인 듯하다. T자 주차, 평행주차, 전방주차 등 모든 코스를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100점 만점을 획득하고 결국 경찰관과 악수까지 나누며 운전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언니와는 달리, 같은 날 나는 가까스로 커트라인 80점을 넘겨서 시험에 합격했으니 말이다. (시험에 한 번에 합격한 것만도 내 실력에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온 가족이 나의 비루한 운전 실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지난 17년 동안 우리 집의 메인 드라이버가 될 수 없었다. 아빠가 술을 마셔 술집에서 집까지 단거리를 운전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거나,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이 친정에서 가족들과 술을 마시는 날. 결국 나는 누군가를 대신하는 상황에만 운전석에 앉고는 했다. 그리고는 술에 취한 사람도 벌떡 일어나 조수석 손잡이를 움켜쥐게 만드는 ‘살벌한 드라이버’가 되었다.     




뉴질랜드에 가기 전,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바로 ‘운전’이었다. 외국에서는 필연적으로 운전을 해야 하기에 나는 출국 전 3개월 동안 틈틈이 운전연습을 했다. 주행은 그래도 할만했다. 지난 몇 년간의 대리 경력도 있었고 주행은 전방만 주의해서 달리면 되기에 할 만했다. 걱정은 주차였다. 주차할 때마다 나의 공간감각은 뒤죽박죽 섞여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차의 꽁무니 감각을 익히라는 남편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주차하는 법에 대한 동영상을 유튜브로 보거나 심지어는 주차 연습하는 어플리케이션을 깔아서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뉴질랜드 운전에 대한 동영상을 찾아보며 공부하기도 했다.     






<오 마이 갓. 뉴질랜드 운전은 한국과 정반대!>

뉴질랜드의 운전석은 한국과 정반대다.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고 깜빡이와 와이퍼의 위치가 반대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기어 변속도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해야 한다. 또한, 이곳은 신호등보다 회전 교차로(Round about)이 많다. 회전 교차로에 들어가기 전 좌회전, 직진, 우회전, U턴 상황에 따라 깜빡이 넣는 법이 조금씩 다르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수없이 동영상으로 보았지만, 뉴질랜드에 도착해 막상 운전대를 잡으니 긴장감이 차올랐다.      




친정엄마가 함께 계셨던 며칠 동안 매일 운전 연습을 했다. 친정엄마는 베테랑 운전자다. 엄마의 조언대로 침착하게 운전을 했고, 내비게이션 거리 감각을 익히는 법도 배웠다. 긴장되었지만 비교적 장거리도 나가보았다. 아이들을 태우고 근처 바닷가, 공원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많이 좋아졌어!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는 걸.”

집에서 30분 거리의 공항까지 차로 엄마를 배웅할 정도로 나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여전히 긴장은 되었지만 아주 조금씩 자신감이 스며들었다.     




그날은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틀 뒤였다. 유치원에 데려다준 아이들을 픽업하고 집으로 가는데 아이들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차 안은 아이들의 짜증 섞인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카시트 자리 때문이었다. 앞자리에 앉지 못한 아이가 대성통곡을 했다. 덩달아 앞자리에 앉은 아이도 난리를 피웠다. 갑작스럽게 차문을 열었는지 순간 경고음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기어를 훽 낚아채려고 했다. 땀이 삐질.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당황된 마음으로 깜빡이를 넣으려니 자꾸만 와이퍼가 작동되었다. 뒤에 따라오던 차가 짜증 났던지 클락션을 울렸다. 빵빵!     




어떻게 집까지 운전했는지 모른다. 심장을 조여가며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후진주차를 하기 위해 기어를 변속하고 엑셀을 밟았는데, 차가 뒤가 아닌 앞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왼손으로 기어 변속을 했다고 착각하고 엑셀을 밟은 것이다. 순식간에 나의 차는 옆집의 울타리를 부수고 작은 창고를 들이박았다.      



“쾅”

차가 부딪히자 아이들이 당황했는지 그제야 울음을 뚝 그쳤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이제 나 어떻게 해야 하지...?’

차를 빼기 위해 후진을 했지만 앞바퀴가 끼어서 차가 도무지 뒤로 빠지지 않았다. 운전석에서 문을 열었지만 울타리에 박힌 운전석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동을 끈 뒤, 조수석으로 건너가 차량에서 빠져나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Mrs. Kim, are you all right?”

이웃에 사는 JJ가 차에서 겨우 빠져나온 나를 대뜸 안아주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하나씩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다. 우선 아이들을 모두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집으로 들여보냈다. JJ는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안심시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내 보험사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견인 업체를 불러 차를 수리점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울타리와 창고가 손상된 이웃의 집에 편지를 써서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연락하라며 심지어 자기의 핸드폰 번호까지 적어두었다.   



   

으슥한 밤이 되자 울타리가 망가진 집의 주인인 Megan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사뭇 긴장이 다시 밀려들었다.

“I am so sorry. It’s all my faults. I don’t know what I did. Very sorry about this.”

Megan에게 나는 정말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당연히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낼 줄 알았다. 한국이었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운전했냐고 화부터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되레 나를 다독여주었다. 자신도 예전에 상하이에서 살았는데 운전석이 반대라서 혼동되고 두려웠다고 이야기했다. 낯선 곳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괜찮으니 무엇이든 힘든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자신의 집을 망가뜨린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것. 쉬워 보이면서도 참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이곳과 나는 맞지 않는 걸까. 앞으로 나 혼자 잘할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장이 여전히 쿵쾅쿵쾅 뛰었고 박살나버린 울타리와 견인된 차가 계속 떠올라 그 잔상이 내 가녀린 어깨를 계속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잘 해쳐나갈 수 있을까 칠흑 같은 터널에 갇힌 것처럼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6개월은 걸려. 어떻게 한 번에 적응할 수 있겠어. 힘들어도 시간은 지나갈 거야. 할 수 있지?”

불현듯 아침에 내가 아이들에게 건넨 말이 떠올랐다. 나는 큰애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학교에 가기 두려운 아이에게 별거 아닐 거라며 오늘 하루도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두려워하던 아이는 끝내 용기를 내어 학교로 들어갔다. 아이는 나에게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걱정 말라고 오히려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세쌍둥이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 영어조차 뱉을 수 없던 어린아이들은 낯선 선생님과 아이들을 보자 펑펑 울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이따 올 거야. 잘할 수 있을 거야.’ 라며 우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냉정하게 밖으로 향했다. 2주가 지난 지금, 아이들은 이제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지 않는다. 의젓하게 나에게 인사를 건넨 뒤 스스로 교실로 걸어 들어간다. 한 마디 영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왜 나만 힘들까.’

처음 나는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나에게만 힘든 일이 드리워져 있고 나만 고생하고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나처럼 힘들게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훨씬 이상으로 잘 따라와 주고 힘겹게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내 삶은 홀로 지탱했던 게 아니라 함께 지지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버텨주고 도와주고 있던 것이었다.    

 



좋은 이웃을 만난 것도 그렇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이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JJ는 보험사에 연락을 취해준 것도 모자라 다음날 아이들 유치원 픽업을 도와주고 임시차량을 받기 위해 나를 시티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이트를 적어왔다며 똑똑 현관문을 두드린다. A4용지를 내려다보니 뉴질랜드 공휴일과 참고할 만한 사이트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써준 것도 모자라, 타인에게 이렇게 과분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줄 수 있을까. 과연 나였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 사고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감사한 일상의 중심에 살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아이들의 하루도 나처럼 얼마나 절실했을지.      




그렇게 오늘도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는다.

마음속으로 나에게 중얼거린다.

“너는 할 수 있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운전대에 앉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누군가를,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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