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돌아보니, 친구도 가족도 없다 40살 여전히 힘든 인간관계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다시 닫고 만다.
누군가와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말할 사람이 필요한데 연락할 사람이 마땅치가 않다.
오래 연락을 안 하고 지낸 친구 A가 생각난다.
A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다. 어렸을 땐 참 친했다. 둘도 없이 못 살았다. 방학 때는 하루 두세 시간씩 통화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고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그 애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나도 그 애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대체 결혼식이 뭐라고. 그런데 그때는 그게 중요했다.
의도적으로 기억한 건 아닌데도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 얼굴을 보면,
머리 위에 숫자가 아른거렸다. 축의금 액수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떠올랐다. 나는 속물이었다.
몇 년 후 그 애에게 문자가 왔다. 잘 지내냐는 문자였다. 그런데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우리 사이는 끝이 났다.
오래 연락을 안 한 친구 B도 떠오른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했고 친한 절친이었다.
비록 다른 고등학교, 대학교를 갔지만 회사를 다닐 때 가끔 점심도 먹고 서로의 생일에는 늘 잊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B가 내게 돈을 꾸고 갚지 않으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B가 사채를 쓴다는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백했고 나는 그 애의 눈물에 돈을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애가 내게 갚기로 한 날짜는 자꾸 지나갔고 어쩔 때 그 애는 내 연락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깟 수백만 원이 우정보다 찐하랴.
그런데 그때는 돈을 갚지 않는 그 애가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실망스러움을 그 애에게 표현하고 말았다.
몇 개월 후 그 애는 내게 돈을 갚았다. 우리는 서먹해졌다.
남편의 말을 들어야 했을 것을.
어리석게도 난 수백만 원과 수십 년의 우정을 맞바꾸었다.
난 친언니나 엄마와도 그리 친하지 않다.
동생에게는 가끔 속내를 비치기도 하는데 성인이 되니 우리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고 그것도 가끔은 불편하다.
나는 늘 힘든 일이 있으면 속으로 삭이며 혼자 생각을 한다.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무언가를 떠들 때도 있는데,
남편과의 대화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해결이 아니라 그저 공감을 바라는데, 그는 훈계를 하려고 든다.
세 쌍둥이를 출산하고 반강제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일 년 동안 거의 외출을 하지 못했다.
문화센터를 가거나, 가끔 친구들과 만나서 외식을 하는 그런 평범한 것들은 내게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었다.
가족끼리 캠핑을 가는 것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누군가의 집에 가는 자체가 민폐라고 생각했다.
큰맘 먹고 아이들을 친정에 데리고 갈 때면 힘들어하는 엄마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나로 인해, 우리 아이들로 인해, 누군가가 힘들어하는 것이 불편했다.
나의 소심함과 예민함은 그 섬세한 불편함들을 빨리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불편한 공기를 견딜 수 없어 결국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졌다.
내 곁엔 친구도, 가족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쓸쓸함도 적응이 되었다. 그 적막함도 어쩔 때는 평온함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 학부모 모임과 같은 형식적인 모임 자리를 가져야 할 때면 나는 두통을 앓았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에, 재빨리 돌아가는 수많은 대화를 놓치지 않고 그것을 바쁘게 따라가며 집에 돌아올 때면 진이 빠졌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안쓰럽고 눈물이 났다.
난 그렇게 나만의 고독의 섬에서 아이들과 고립된 삶을 살았다.
세상과의 유일한 끈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버려질 것만 같았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기에 떠나는 것도 홀가분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와서도 나는 평범한 엄마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삼삼오오 모여 커피숍이나 맛집에 가는데 끼지 않고,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 미친 듯이 공부하고 졸업했다.
그렇게 내 나이는 어느덧 마흔이 되었다.
돌아보니 이 나이까지 진정한 친구 하나를 손에 꼽을 수 없다는 것이 참 슬펐다.
가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전화걸 수 있는 사람 하나가 없다는 것이 비참했다.
예민하고 뾰족하게 살아왔던 것들이 참 후회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나의 부족함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을 돌보는 만큼이나 내 주변을 돌보는 것도 삶의 중요한 일부였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토마스 애덤스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난 얼마나 상대방에게 관대한 사람이었을까. 난 언제나 받기만을 바랐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내게는 인간관계가 어렵고 나는 매일 실수하고 후회한다.
마흔은 여전히 내게 어리숙하고 불안하며 미숙한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