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대기업 퇴사, 아들넷 데리고 엄마 홀로 이민, 해외취업
먼저 나는 이민이라는 것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나는 어학연수 시절 캐나다에서 인턴을 했었는데, 회사에서 비자를 스폰해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했었다.
쉽게 이민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이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한국에서 빨리 졸업하고 취업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저 남들처럼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잘 사는 거라고 배웠다.
그렇게 8년간 한 회사에 내 인생을 갈아 넣었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 세상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지만,
하루아침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멀쩡했던 대기업이 파산했다.
회사를 퇴사하던 날, 지난 8년간을 돌이켜보니 아무런 추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간, 지옥철을 지나 가까스로 자리에 앉고 하루종일 일을 하며,
고작 했던 유일한 나의 행복은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였다.
정말 슬펐다. 지난 8년간 아무 추억이 없다는 게 나는 그렇게 슬펐다.
그것은 마치 내 인생의 거대한 조각이, 나의 젊었던 청춘이 부서져버린 아픔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 영원한 철옹성은 없다는 걸.
한 기업의 소모품으로 안정을 추구하며 평생을 사는 것보다,
어쩌면 내 인생의 주인으로 경험하고 겪어내며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나는 왜 캐나다에 남지 않았을까?
나는 그때의 선택을 참 많이 후회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나는 그저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갈 그 작은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남들 다 가는 대기업, 남들 다 사는 자동차, 남들 다 시키는 사교육.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것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강남에서 큰애를 키울 때도 그랬다.
당시 우리는 조그만 빌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큰애 학부모 모임에서 빌라와 아파트에 사는 사람 사이에 오묘한 경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급하게 빌라 옆 낡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칠 년간 끌었던 옵티마를 팔고 중고 벤츠를 샀다.
나는 그것이 뱁새가 황새를 쫓듯 무리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 옷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철옹성 같았던 대기업이 무너진 순간, 김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순식간에 아들넷 전업맘이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진 게 너무 감사했다.
더 이상 무엇이 될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는 게 홀가분했다.
나는 그렇게 진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소소하게 이뤄나갔다.
글을 쓰며 두 권의 책을 출간했고 강연을 하고 라디오에도 출연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나와 남편은 많은 시간 동안 그것을 고민했고, 우리는 그 답을 바로 '경험'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한 권의 책이 줄 수 있는 지혜보다 더 깊은 삶에 대한 직접경험은 아이들의 시야를 넓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여행을 참 좋아했다.
외국에 가면 그 종착지가 어디든 나는 처음 맡보는 그 도시의 냄새에 설렜다.
인도 캘커타의 퀴퀴했던 무언가가 탄 듯한 그 냄새,
캐나다 밴쿠버 어느 항구에서 맡았던 쾌적했던 바다 냄새,
알래스카에서 맡았던 광활한 자연의 흙냄새,
도시 특유의 냄새는 그곳이 가진 정체성 같았다.
세상은 넓고 그곳에는 무궁무진한 빛깔이 존재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처럼 미친 듯이 공부해서 취업에 골인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안전한 아스팔트 위의 도로보다 때로는 흙길을 뒹굴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를 바랐다.
현실적으로도 아이 넷을 강남에서 사교육 하며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현듯 이것이 내 인생의 두 번째 기회일 것 같다는 강렬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었다. 막상 마음을 먹으니 이 결정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빨리 출국을 하고 싶어졌다
당시 가장 빨리 나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뉴질랜드였다.
캐나다와 호주는 당시 뉴질랜드 보다 비자 처리가 더 까다롭고 느렸다. 뉴질랜드의 상대적으로 낮은 환율도 한몫을 했다.
또한 캐나다와 호주의 유치원 비용은 어마무시했지만,
이에 반해 뉴랜드는 관광비자의 아이에게도 정부에서 유치원 비용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일 년에 천만 원 정도의 큰애 유학비용을 지불했고 세 쌍둥이의 유치원은 무료였다.
큰애는 학생비자, 나는 가디언비자, 세 쌍둥이는 관광비자, 한 달 만에 비자가 승인이 되자 우리는 그날로 출국을 했다.
출국하기 전 준비하는 것은 렌트집 결정, 중고차 구매, 보험, 큰애의 일 년 치 유학비용이 전부였다.
실질적으로는 차량과 보험, 그리고 교육비에 2천만 원가량을 지불한 것이 전부다.
일단 목표는 최대 3년으로 잡았다. 이때까지도 이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짐은 단출했다. 세 쌍둥이 유모차를 끌어야 했기에 짐이라고는 이민가방 2개가 전부였다.
아이들이 쓰던 침구와 전기밥솥을 제외하면 몇 벌가량의 옷만 챙겼다.
우리는 몸만 떠나는 게 아니라 마음도 비웠다. 정리를 하는 그 과정이 나는 참 홀가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구 반대편 작은 섬나라로 떠났다. 큰애는 9살, 세 쌍둥이는 3살, 남편도 없이 아들 넷을 데리고 홀로 떠났다.
결심하고 한 달만의 일이었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세 명의 아기를 데리고 13시간 장거리 비행은 쉽지 않았다.
난 그때 가져온 기저귀를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과연 난 용기를 내었던 것일까. 아님 그것은 치기 어린 무모함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그 무모함이 아니었다면 난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무모함이 내 인생 최대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