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기 딱 좋은 날이다.
밖으로 나가자는 말에 아이들은 첫눈 본 강아지 마냥 잔뜩 흥분 중이다.
알아서 척척! 우비에 장화까지, 벌써 나갈 채비를 마쳤다.
(자 한번 시작해 봅시다. 탐험을 시작해 봅시다.)
아이들은 탐험놀이를 좋아한다.
이곳 뉴질랜드는 지천에 산과 들, 바다가 널렸다.
아이들은 드넓은 자연에 일부가 되어 마음껏 뛰고 구른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예민 맘이었다.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뛰면 끝까지 쫓아가 신발을 신겼고,
맨발일 땐 한 명씩 둘러업고 화장실로 달려가 씻겼다.
빨래 걱정, 뒤처리 걱정.
놀이 안에서 일어나는 배움보다는,
그것으로 겪게 될 나의 수고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큰맘 먹고 촉감 놀이를 했던 날도,
십분 만에 집은 난장판이 되고 마지막은 나의 샤우팅으로 끝이 났다.
결국 주말마다 여러 체험전을 전전했다.
비싼 가격에 밀가루 체험전을 가기도 했고,
페인팅 체험전을 가기도 했다.
어린이 박물관, 과학관, 상상나라 등 부지런히 도 다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현타가 찾아왔다.
두 살 남짓한 아기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쳐야 하는 현실이 힘들었다.
낡은 아파트는 층간 소음에 취약했고,
온 집안에 매트와 이불을 잔뜩 깔았는데도 아랫집에서 수시로 올라왔다.
아들 넷 아래 집에 살고 있는 그분들께도 죄송했고,
이사를 간다 한들 우리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동시에 이렇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뛰지 마. 조용히 걸어. 뒤꿈치 들고.
마스크 제대로 써. 미세먼지 때문에 못 나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에 익숙해야 하는 아이들이 불쌍했다.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떠나자고. 이렇게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결심한 지 두 달 만에 비행기에 올랐다.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제법 약해졌다.
구름으로 가려진 어두운 숲 속이지만, 겁이 없는 아이들은 씩씩하기만 하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계속 걸음을 멈춘다.
나무속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재잘거리는 새소리도 그저 반갑고,
바닥에 널브러진 낙엽도 신기하고,
매일 보는 거미줄도 새로운가 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양 갈래 길을 만났다.
(어디로 가지? 난 이쪽! 난 이쪽!)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이럴 때는 제법 난감하다.
(아이고! 시또! 나, 아파 다쳤어)
2호가 꾀를 썼다. 넘어지지 않았는데 넘어졌다고 4호를 다급하게 부른다.
걱정되었는지 4호가 재빠르게 달려간다.
나는 아이들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아이들의 선택이고,
갈등을 조율하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엄마 여기로 가고 싶어. 그럼 가는 거죠)
길을 선택하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위험하지 않다면 말이다.
호기심이 많은 2호는 오늘도 길을 개척하려고 하나보다.
작은 개울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아이들에게 탐험의 재미를 알려준 것은,
다름 아닌 실습으로 나갔던 포레스트 유치원에서 경험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나는 프리스쿨의 아이들을 데리고 숲탐험을 했는데,
선생님들은 일부러 길이 아닌 곳을 지나게 했다.
아이들은 얕은 물을 건너기도 하고,
통나무 다리를 건너기도 하며,
진흙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베이스캠프를 쳐서 점심을 먹고 하루를 보내다 돌아왔다.
그때의 기억이 좋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같은 코스를 탐험했다.
때로는 넘어지고 구르고 부딪혔지만,
끝내 도착한 폭포에서 경험한 성취감이란!
나는 아이들에게 바로 이런 태도를 길러주고 싶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살아가는 단단한 태도,
달려라 하니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나무다리를 건너고, 시냇물에 발을 담고,
미끄러운 진흙을 네 발로 기어오른다.
(시또 이거 잡아)
먼저 올라온 아이는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를 챙긴다.
마침내 작은 다리를 지나 미로는 끝을 만난다.
고된 운동 끝에 만나는 잠깐의 휴식은 또 얼마나 꿀맛인지.
얼마나 왔는지 지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그런데 아이들의 탐험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다.
동네를 돌고 돌아 이번에는 집 근처 바닷가로 간단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온 나의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어쩌하랴. 이번에도 따라간다.
아이들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조개를 줍기도 한다.
미역을 퍼서 나르기도 하고,
작은 막대기로 야구를 하기도 한다.
장난감은 따로 필요 없다. 자연의 모든 것이 장난감이다.
갑자기 아이들이 부지런히 나무를 가져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한다.
(지금 뭐 만들어요? 똥!)
(이건 사람이에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기발한 작품들을 보는 것이 나는 그저 즐겁다.
어느덧 분홍빛 저녁노을이 하늘을 물들인다.
잔잔히 출렁이는 바닷물에 비친 붉은 노을이 참 아름답다.
시시각각 변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하늘,
적당한 온도와 쾌적한 바람 속에 실려오는 바다의 냄새,
곧 파도 속으로 씻겨 나갈 아이들의 작품들마저.
나에겐 감동이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밤,
우리는 뚜벅뚜벅 집으로 향한다.
(발 아파. 못 걷겠어)
발 아프다고 투정은 해도 절대 업어 달라는 말이 없다.
엄마는 허리가 아프니까.
엄마는 하나고, 아이는 넷이니까.
아이들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집이다!)
드디어 집에 거의 다 왔다.
아이들은 신었던 장화와 우비를 정리하고,
나는 서둘러 저녁을 만들고 설거지와 빨래를 한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난 늘 날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