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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Apr 24. 2019

세상에 이런 인연도 있습니다.

두 번째 책을 계약했습니다.


나는 인연이라는 것을 믿는 편이다. 인연은 대게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얼굴을 바꾸기도, 어떤 때는 갑작스럽게 끊어지기도 한다. 철저한 타인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고, 어느 날 화염이 타오르듯 연인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린 재처럼 다시는 맞닿지 못할 길을 걷기도 한다. 한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사이였지만 하루아침에 남보다 더 못한 사이로 전락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흔히 인연이 아니었다는 한 마디로 흘러왔던 복잡 미묘한 시간들을 단순화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인연은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각양각색의 실타래처럼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어져있다.



여기, 이런 인연도 있다. 십년 전 회사 동료로 그리고 지금 출판사 대표와 작가로, 그녀와의 소중하고 특별한 인연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와 나는 입사동기였다. 그녀는 본사에서 그리고 나는 부산지점에서 신입 첫 근무를 시작했기에 사실 그녀와는 그렇게 돈독해질 기회는 없었지만, 가끔씩 동기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아직도 내 결혼식에 와주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결혼식 이후 어느 날, 그녀는 반색하면서 남편이 자신이 좋아하는 한 외국 배우를 닮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배우 사진을 그녀와 함께 보면서 한참을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십년 전 사진 속 남자를 들여다보며 가벼운 웃음을 흘려보냈던 그녀가, 십년 후 그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기획하게 되다니, 인생이라는 것은 정말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도 미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는 늘 옆에 있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에너지가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에너지, 그녀에게는 항상 그런 기운이 맴돌았다. 용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사에 입사한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녀는 동기들에게 돌연 퇴사한다고 밝혔다. 회사생활이 지겨워도 힘겹게 취업한 대기업이었기에 대부분의 동기들은 감히 퇴사를 할 용기는 갖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매달 스치듯 안녕 하는 알량한 월급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회사에서 내동댕이쳐졌던 그 순간까지, 나는 감히 회사를 나갈 엄두를 갖지 못했다. 그랬기에 입사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그녀가 낸 용기는 내게 너무나도 대범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우리의 인연도 그 정도의 얼굴로 끝이 날 줄 알았다.



“동기들, 제가 책을 내게 되었어요.”



작년 동기 방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그녀가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출판 일을 하고 있는지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은 없었고, 나는 엄마로 그녀는 싱글로 교집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 책을 계약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녀와 내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니 그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첫 책이 출간되고 몇 개월 후, 어느 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책을 재밌게 읽었다며 오랜만에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잊고 있던 서로의 삶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꿈, 도전, 가치. 그녀의 삶에는 짙은 향기가 배어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용기는 여전히 대단해보였다. 그저 글쓰기가 좋아서 출판사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고 최근 자신의 출판사를 설립했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두 번째 원고를 써놓은 게 있냐고 물었다.



“여름에 써놓은 원고가 있긴 한데 아직은 자신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글은 못된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자신이 없기도 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이라는 것은 시간에 따라 숙성된다고 믿었기에 오늘, 일주일 후, 육 개월 후, 일 년 후에는 조금 더 여물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여름에 써놓은 원고를 겨울이 되어 다시 열어보기로 했다. 하루하루 원고들을 다시 퇴고하면서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차곡차곡 올리기를 시작했다. 완성된 원고를 투고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저 사람들과 글을 통해 먼저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투고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몇 개월 후,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과 함께 책을 내보자는 제안이었다. 내 글이 좋다고 했다. 진지하고도 유쾌하다고 했다. 두 번째 책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 나름대로 생각도 정리해보았다고 했다. 내 글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책을 낸다면 그녀와 함께 작업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느 날 갑자기 봄바람이 꽃잎을 싣고 살랑살랑 불어오듯 그녀의 제안은 나의 피부에 가느다랗게 스며들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대답했다. 책이 어떻게 기획될지, 혹은 세부 조건이 어떤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회사동료에서 편집자와 작가로 우리의 신기한 인연이, 복잡한 실타래에서 풀어져내려 결국은 다른 색깔로 다시 만난 우리의 인연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 다듬고 다듬어 세상에 내어놓을 한 권의 책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번 책은 한때 회사동료였던, 그리고 돌고 돌아 지금 편집자와 작가로 다시 만난 한 신기한 인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될 것이다. 얼마 전, 그녀와 계약을 한 뒤 나는 매일 열심히 두 번째 책을 퇴고 하고 있다. 이번 책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삶의 고민, 공허함, 자존감, 꿈과 같은 가치들을 닮은 듯 별반 다르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 내렸다. 어느 날 불현 듯 찾아온 삶에 대한 공허함과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깨닫기까지의 시간들, 그리고 삶을 오롯이 내 것으로 채워가기까지. 누군가의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 살아가며 자신을 잃고 사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 올해 하반기, 나의 두 번째 책이, 그것도 소중한 인연과 함께 만든 특별한 책이, 세상의 빛을 볼 예정이다.



세상에는 이런 인연도 있다. 한때는 회사 동기로, 지금은 편집자와 작가로 만난 우리의 특별한 인연을 떠올리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바로 인생이라는 것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책에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삶의 진정한 감독은 바로 우연이라는 것. 때로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가 인생의 가장 큰 기회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을 이끌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연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인연은, 아니 우연은, 그리고 이 책은 아마도 필연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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