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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ul 04. 2019

할머니네 가마솥 백숙

소박한 한상에는 누군가의 정성과 희생이 깃들어 있다.


꼬끼오.

닭이 울었다. 단번에 나는 그것이 꼬꼬의 울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꼬꼬는 내가 예뻐하는 닭이다. 그는 여느 닭들과는 다르다. 짙은 황토색 털은 유난히도 매끄러운 윤기를 지녔고, 붉은 벼슬은 하늘을 찌를 듯이 위엄한 기세로 솟아있다. 꼬리 깃털은 또 어찌나 풍성한지 검은색과 짙은 녹색이 섞여 햇살에 따라 오묘하게 반짝거리며 실로 신비스러운 느낌까지 자아낸다. 목소리도 단연 그다. 시골 할머니네 닭장 위에 두 발로 선채 온몸이 튕겨져 나갈 정도로 멋진 목소리를 뽑아내는 꼬꼬의 모습을, 나는 품 안의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으로 흐뭇하게 바라본다.      



사실 내가 꼬꼬의 엄마라고 얘기해도 뭐 반쯤은 틀린 말은 아니다. 꼬꼬가 하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그날부터 꼬꼬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건 다름 아닌 바로 나니까. 샌 노란 빛깔의 앙증맞은 병아리가 벌써 이렇게도 늠름한 수탉이 되다니, 꼬꼬를 바라볼 때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게 흘러가지 않는 것 같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조막만 한 햇병아리에서 어엿한 어른 닭이 되었지만, 아홉 살인 나는 아직도 실수투성이에 여전히 할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는 사고뭉치 아이다. 어쩌면 더디게만 흘러가는 나의 하루가 꼬꼬에게는 일 년과도 같은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오늘 꼬꼬를 잡는단다.”

할머니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꼬꼬를 잡는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연실색이 되어 당장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꼬꼬는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무덤덤한 할아버지는 내 이야기가 들리시는지 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가마솥을 피울 장작을 패고 있었다. 탁. 탁. 쪼개지는 장작 소리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선명하게 균열을 일으킨다. 당장이라도 마음이 바스러질 것만 같은 통증을 느낀다. 마음이 희미하게 소리친다. 안 돼요. 안 돼. 꼬꼬는.    


 

“모든 동물은 주어진 명(命)이 있는 게야. 네가 사랑을 주었으니 꼬꼬는 행복할 게다.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키웠으니까. 할아버지가 약속 하마.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꼬꼬를 보내줄게.”      



어느새 할아버지의 오른손에 꼬꼬가 들려있었다. 할아버지는 꼬꼬의 머리에 검은 비닐봉지를 씌운 뒤, 능숙하게 그의 모가지를 강하게 비틀었다. 그리고는 도끼같이 커다란 칼로 머리를 단번에 내려쳤다. 순식간에 버둥거리던 꼬꼬의 몸이 축 늘어진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윙윙 귓가를 맴돈다.

‘짐승도 고통이 있단다.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줄게.’

할아버지는 펄펄 끓는 물에 꼬꼬를 잠시 담근 뒤, 꼬꼬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깃털을 사정없이 뽑았다. 어느덧 목이 댕강 잘리고 온몸의 깃털이 뽑힌 꼬꼬는 무척이나 생경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내가 알던 꼬꼬는 사라지고 마트에서 지겹게 보던 고운 분홍빛의 닭고기가 눈앞에 놓여있다.  




앙앙. 나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사방을 찔러댔다. 나는 비죽 나온 입으로 할머니를 향해 절대 먹지 않겠노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아예 가마솥이 보이지 않는 구석 땅바닥에 주저앉아 홀짝거리며 한참을 흐느꼈다.  





   

이윽고 할아버지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불쏘시개로 아궁이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고 그 안에 장작을 두어 개 채워 넣었다. 가마솥 안에는 백숙을 만들 물이 순식간에 펄펄 끓고 있다. 할머니의 손도 바삐 움직였다. 할머니는 내장을 빼낸 닭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꼬리 부분의 기름 덩어리를 잘라냈다. 이후 닭 뱃속에 마늘, 밤, 대추, 황기 등을 채워 넣었다.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 안에 어느새 배가 불룩하게 나온 닭과 각종 약초 그리고 여러 가지 버섯들이 함께 어우러져 끓고 있다. 할머니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뜨거운 아궁이 앞에 앉아 수시로 기름을 걷어 내고 정성을 쏟았다.  태양이 작렬하듯 이글거리는 어느 복날이었다. 할머니의 이마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영아, 꼬꼬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네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중요하단다. 할머니가 정성껏 만들었으니 조금만 먹어보렴.”    


 

할머니의 뭉툭하고 주름진 손이 나를 향해 뻗어있다. 땀으로 젖은 할머니의 얼굴이 맑게 빛난다. 고소한 냄새에 슬며시 가마솥 쪽으로 눈길이 간다. 어린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머니, 꼬꼬도 정말 그걸 원할까요?”

“그럼. 그렇고말고.”     



할머니가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활짝 웃고 있다. 넘실거릴 것처럼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나는 꼬꼬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꼬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하여.     



꼬꼬는 본래 이 세상에 왔던 그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주고 떠났다. 그의 살과 내장 그리고 뼈는 어느 하나 버려지지 않았다. 지친 누군가에게는 영양분이 되었고, 가축에게는 사료가 되었으며, 나머지 부산물은 비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결국 그토록 좋아하던 할머니 표 백숙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사실 할머니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죽죽 찢어준 묵은 지와 고소한 백숙은 어린 내가 가장 좋아했던 환상의 조합이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꼬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코기 몇 점을 먹기 시작해봤지만 자꾸만 마음속에 꼬꼬의 모습이 일렁거려 그만 먹는 것을 포기했다.       






그날의 잔상은 어린 나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사실 어렸을 때 그 기억은 다소 불편하고 충격적인 그래서 절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기억 이면에 담긴 따뜻한 의미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음식을 존중하는 마음과 식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하는 것, 먹어야 한다면 살아있는 순간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성껏 키우는 것, 그리고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마지막 순간을 보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 마지막으로 남김없이 먹는 것 또한 숭고한 희생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2,900원 무한리필 뷔페. 어느덧 우리는 소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과 가끔 프랜차이즈 뷔페에 가면 매번 접시에 수북이 음식을 담아와 먹었다. 어떤 때는 배가 부른대도 본전을 생각하며 한 그릇이라도 더 먹겠다고 덤비기도 했고, 어떤 때는 잔뜩 담아온 음식을 거의 그대로 남기기도 했다. 다양한 뷔페 음식을 먹다 보면 속은 더부룩해지고 식재료 고유의 질감과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배를 채우고 또 채워야만 하는 욕구만이 남았다. 아이들에게도 뷔페는 익숙한 곳이 되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뷔페는 그렇게 흔한 곳이 아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양껏 먹고 쉽게 버리는 것에 익숙하다. 과연 결핍이 없는 아이들이 자라 만들어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무서운 걱정이 앞선다.     




마음껏 소비하는 시대. 저렴한 가격으로 양껏 고기를 소비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소비는 또 다른 공급을 부추기고 솟아오르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가축들이 희생되고 있다. 유발 하라리 교수의 <사피엔스>에는 오늘날 세계에 10억 마리의 양, 10억 마리의 돼지, 10억 마리 이상의 소, 250억 마리 이상의 닭이 존재한다고 적혀있다. 가축화된 닭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진 가금류가 되었다. 그러나 도살 연령은 오로지 경제적 관점을 기준으로 정해졌고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무시되어 왔다. 야생 닭의 자연 수명은 7~12년이지만 보통의 식용 닭은 생후 한 달 정도에 도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마저도 평생을 발 디딜 틈 없는 닭장에 갇힌 채 괴롭게 보낸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현실, 그러나 먹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 ‘그래서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 드라마틱한 결말을 적어 보고도 싶지만, 솔직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공언할 자신은 없다. 나 역시도 여전히 먹는 것을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한 번쯤은 음식을 마주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소박한 한상에는 누군가의 정성과 노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과 나의 한 끼를 위해 희생된 식재료를 때로는 경건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꼬꼬. 이제 그들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 풍화되어 내 머릿속 어딘가에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있다. 뭉근하게 익어가던 뽀얀 국물의 할머니 표 백숙. 타들어간 장작 내음이 스며든 살코기와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고소한 국물, 그리고 할머니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죽죽 찢은 묵은 지는,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그리고 온 감각 속에 선명히 살아있다. 어릴 적 먹었던 가마솥에 푸욱 삶은 고소한 백숙의 맛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언젠가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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