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넷맘 Jul 08. 2019

한 끼의 러브레터

서른여섯 나의 끼니를 걱정해주는 유일한 사람.


“잘 지내냐.”

또 아빠다. 요즘 들어 아빠의 전화가 빈번해졌다. 사실 누구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럽지만 서른여섯이라는 나이까지 아빠와 직접 전화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나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 편한 ‘엄마’라는 채널이 있기에 이제까지 나의 모든 안부는 엄마를 통해 아빠에게 전달되고 전해졌다. 가끔씩 엄마가 아빠에게 수화기를 건네준 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와 마주할 때마다 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게 떨렸고, 다음 맞받아칠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순간 우리 사이에 숨 막힐 듯 정적이 감돌기도 했다. 난 항상 그 아득한 정적이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삼십 초를 넘어선 적이 없다.



     

“떨리지는 않니?”

지난번, 내 인생 첫 번째 강연을 했던 날, 강연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가족들에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아빠의 전화는 내게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아마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강연 시간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동안 무언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아빠로부터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전화가, 그의 따뜻한 음성이 놀라울 정도로 어색하다.




“네가 자랑스럽다.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책을 내고 강연까지 하게 되다니.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아빠답지 않은 표현들이 수화기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아빠와 나 사이에는 평생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생경한 말들이 수화기에서 튀어져 나와 가슴속에 마구 박혔다. 순간 목구멍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고 차올랐다.      




“연락 안 주셔도 되는데. 오늘 떨지 않고 잘해볼게요.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부녀간에 불필요한 예의는 지난 세월 동안 겹겹이 쌓여 닦여진, 좀처럼 좁혀지기 힘든 우리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 아빠가 내밀고 있는 한 발자국이 그에게 매우 어색하고 쉽지 않은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나는 바보같이 아빠를 향해 움직이지 못한다. 그에게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다. 용기가 부족하다.      








어린 나의 기억 속에 아빠라는 존재는 다가가기 힘든 두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일에 바빴고 조그만 일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아빠와 눈을 맞추고 다정히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도 없다. 어린 내게 그는 오르지 못할 거대한 산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 거칠고 거대한 산을 조금씩 풍화해왔다. 이곳저곳 깎이고 둥글게 마모된 지금의 그의 모습에는 어릴 적 보았던 강렬하고 거침없는 카리스마를 찾을 수 없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순해져 버린 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모순적인 슬픔을 느낀다. 유난히도 축 처진 아빠의 어깨를 발견했을 때, 나란히 선 그의 키가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 거칠어진 아빠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 머리털이 몇 가닥 남아있지 않는 머리에 어색한 가발을 가까스로 얹고 있을 때, 묵묵히 딸들의 의견에 따르며 손주들에게 한없이 상냥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되어있을 때, 나는 어린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할 줄 알았던 거대한 아빠라는 산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동시에 내 뒤에 언제까지나 건재할 것만 같았던 아빠라는 존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두렵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상추 있니? 고추는? 감자는? 잘 먹고사는 거냐.”

아빠의 천직은 아마 농부인 것 같다. 집 앞 주말농장에 농사를 짓고 있는데 수확이 꽤나 좋은 편이다. 상추부터 고추, 감자, 오이, 토마토, 가지, 갖가지 나물에 이르기까지 좁아 보이는 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아빠는 비료 외에는 일체 농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빠의 농장에서 수확된 채소는 예쁘지도 크지도 않다. 어떤 때는 축축한 흙이 군데군데 붙어있고, 초록색 배추벌레 혹은 조막만 한 달팽이가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먹기에는 제법 손이 가더라도 맛은 일품이다. 여린 상추는 보드랍고 오이는 무척이나 달다. 예쁘지 않아서, 들쭉날쭉 제멋대로 생겨서, 내겐 더 예쁘다.     




사실 어렸을 땐 온통 풀밭인 밥상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그 흔한 소시지, 참치, 짜장을 구경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라면도 일 년에 한 번 끓여먹을까 말까였다. 그마저도 아빠가 양파, 버섯, 파를 있는 대로 잔뜩 넣어 라면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없는 ‘채소 잡탕 라면’을 끓였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나는 본래 타고난 육식에 대한 본능을 마음껏 분출하며 살았다.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들을 가까이했고 야식을 시도 때도 없이 즐기기도 했으며 하루 걸러 하루 맥주를 마셨다. 아들 넷을 육아해야 했기에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침에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아침밥을 굶었고, 점심에는 빵과 과자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느새 살이 찌고 몸이 망가졌다. 나의 몸 주위를 맴돌던 향긋한 풀잎 내음은 온 데 간데 사라져 버렸다.      




“괜찮아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잘 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빠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집으로 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들 본지 오래되었으니 간만에 집에 와서 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조심스러웠다. 아빠의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고, 아빠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어색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볼 자신도 없었다. 무엇보다 수십 년간 지속해온 아빠와 나의 좁혀지지 않는 길목에 최근 무언가 터져 나와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도 이런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가슴 벅차고도 동시에 두려운 일이었다.     






“할아버지 왔다.”

며칠 뒤, 갑자기 아빠가 왔다. 초인종이 울리자 네 명의 아이들이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투박한 모자에 금테 안경, 청바지를 입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눈물 나도록 정겹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와 스티로폼 상자가 들려있다. 아이스박스에는 갖가지 반찬들이 차곡차곡 담겨있고, 스티로폼 상자에는 상추와 고추, 감자를 비롯한 채소가 한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 하나, 모든 것들이 텃밭에서 직접 수확한 채소들이다. 아빠의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이 갖고 왔어요.”

이상하게 이럴 때는 머리와 몸이 따로 놀며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맛있게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라는 말이 맴돌고 있지만, 입은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퉁명스럽게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만다. 텅 비어 있던 냉장고에 모처럼만에 훈기가 돈다. 인스턴트 냉동식품이 즐비했던 냉장고가 초록색 물결로 뒤덮이며 신선한 풀잎 향기가 짙게 풍긴다. 상추, 고추, 감자, 오이, 토마토, 가지를 비롯한 갖가지 채소들과 순무김치, 오이김치, 마늘장아찌, 비듬나물무침, 가지 양파볶음, 직접 만든 쌈장까지 엄마네 냉장고를 옮겨놓은 듯 정겨운 풍경이다.      




아빠가 돌아가고 아이들이 잠든 뒤, 홀로 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잠든 아이들이 깰까 봐, 혹은 설거지가 귀찮아서 평소 같았으면 맥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겠지만 오늘은 혼자 먹을 밥상에 나답지 않은 정성을 기울여본다. 상추를 한 잎, 한 잎 정성스럽게 씻고, 고추와 오이를 가지런히 놓는다. 낮에 쪄놓은 포슬포슬한 감자 한 알을 그릇에 옮겨 담고, 냉장고를 채운 갖가지 반찬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놓는다. 순무김치, 오이김치, 마늘장아찌, 비듬나물무침, 가지 양파 무침, 갖가지 쌈 채소와 직접 만든 쌈장까지 차례대로 올려놓으니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 상 가득 차있다. 향긋한 풀 내음이 진동하는, 눈물 나게 그리웠던 한 상이다.     




밥을 한 숟갈 입 속으로 집어넣으려는 찰나 눈물이 터져 나온다. 반찬을 한 가지, 한 가지 입에 옮겨 담을 때마다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이 한 상은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러브레터다. 사랑한다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이 한 상에는 그보다 더 진한 사랑이 배어있다. 매콤한 순무김치, 아삭한 오이김치, 알싸한 마늘장아찌, 향긋한 비듬나물무침, 달곰삼삼한 가지 양파볶음, 구수한 쌈장까지, 반찬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향기와 메시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딸에 대한 사랑, 안쓰러움, 대견함, 그리움, 응원, 믿음, 고마움, 또다시 사랑.      




여리고 보드라운 상추와 달짝지근한 오이, 풋고추를 구수한 쌈장에 찍어 입에 구겨 넣는다. 행복을 입 안 가득 머금으며 또 한 번 깨닫는다. 이 세상에 서른여섯 아들 넷 엄마가 된 나의 끼니를 걱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여전히 나의 부모라는 걸. 지난 삼십육 년간의 긴 세월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마음은 언제나 조건 없이 나를 향할 것이라는 걸.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네 가마솥 백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