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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ul 11. 2019

캣맘이 되기로 했다.

냐옹아, 내일 또 올게.


쓰레기를 버리려고 했을 때였다. 다리 사이로 물컹한 것이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다시 내려다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쓰레기장 아래를 들여다보니 은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 페인트칠이 흉물스럽게 벗겨진 철제로 만들어진 쓰레기장과 바닥 사이에는 십이 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틈이 있다. 그 틈을 쓰레기로 얼룩이 된 누런색 장판이 덮고 있는데 한 귀퉁이가 찢어져 바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더럽고 냄새나는 이곳이 아마도 은색 눈동자의 집인가 보다.     





수북이 쌓여있는 쓰레기 봉지 주위를 커다란 똥파리가 윙윙 신나게 날고 있었다. 코를 찌를 듯 역겨운 쓰레기 냄새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이상하게 마음이 밟힌다. 겁에 질려있던 은색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다.      


“냐옹아, 배고프니?”     


쭈그려 앉아 냐옹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냐옹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혹시 몰라 고기가 담겨있던 플라스틱 상자를 내밀어 보았다. 플라스틱 상자에는 핏물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는데 배가 고프다면 냄새를 맡고 작은 구멍에서 나올 것 같았다.     





얼마 후 냐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5초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서서히 밖으로 나온 고양이의 모습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성인 손바닥 정도 크기의 새끼 고양이였는데, 검은색과 흰색 얼룩무늬 털 위로 그동안 얼마나 굶었는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미를 잃고 버텨온 이 아기 고양이의 지난 삶이 도드라진 뼈를 통해 비참하게 전해진다. 가여움, 안쓰러움, 이라는 단어로조차 형용할 수 없는 이 작은 고양이가 견뎌온 버거운 삶이 가슴을 파고든다.      





쓰레기장에 수북이 쌓여있는 쓰레기봉투에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난잡하게 섞여있다. 하얀색 쓰레기봉투 사이로 먹다 남긴 치킨 조각, 뜯긴 빵, 과자봉지와 부스러기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바로 옆에는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는데 커다란 통이 가득 찰 정도로 음식물 쓰레기 봉지가 넘쳐있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썩은 음식물 냄새에 악취가 진동을 한다. 넘실대는 음식물 쓰레기와 비쩍 마른 새끼 고양이가 눈물 날 정도로 대조적인 모습이다.     





“냐옹아, 잠깐만 기다려.”


플라스틱 상자에 묻어있는 핏물을 조심스럽게 핥고 있는 고양이에게 잠시 이야기를 하고 부리나케 집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닭 가슴살 한 봉지를 뜯어와 플라스틱 상자에 조금씩 찢어 주었다. 다행히 냐옹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에 깜짝 놀라 쓰레기장 밑으로 들어갔지만, 잠시 후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듯 오른발, 왼발을 아주 조심스럽게 디디며 닭 가슴살 조각을 향해 전진한다. 그리고는 닭고기 한 덩이를 입에 물고는 쓰레기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쓰레기장 앞에 앉아 고양이의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 덩이를 먹고, 또다시 나와 한 덩이를 물고, 또다시 조심스럽게 나와 한 덩이를 갖고 들어간다. 어느새 다 먹었는지 나올 생각이 없다. 조금 기다리다 어두컴컴한 틈에 반짝거리는 은색 눈동자를 향해 나지막이 이야기를 했다. 냐옹아, 내일 또 올게.     





사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고등학교 때 홈스테이에 살았던 고양이가 내 다리를 무섭게 할퀴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다친 이후로 고양이를 보면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고양이의 차가운 눈빛이 섬뜩했고, 친숙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닭살 돋을 정도로 낯설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 지하에도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가끔씩 아파트 입구로 들어갈 때마다 고양이와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두려움이 밀려와 들어가기를 한참동안 망설이기도 한다.      




검은 고양이는 이 낡은 아파트의 지하실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내가 이곳에 이사 온지도 삼 년이 넘었는데 아마도 그전부터 살았던 것 같다. 나이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아파트에 그의 골수팬이 많은 것으로 짐작해 보건데 이웃들과 여러 해를 부대끼며 살아온 노령인 것 같다. 가끔씩 그의 골수팬들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사료와 통조림을 놓아둔다.       





“고양이한테 먹이 주지 마세요.”


쭈그려 앉아 냐옹이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 이야기했다. 그의 어조가 딱딱하지 않아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대낮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폴폴 새는 술 냄새에 적지 않게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챙겨준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 길고양이 개체 수가 증가하면 이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기에, 누군가의 선의는 다른 사람에게 불쾌하게 다가갈 수 있다. 실제로 캣맘과 갈등을 이유로 캣맘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한 폭행 사건을 우리는 뉴스 기사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13년에는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는 주민들의 민원으로 인해 길고양이가 머무는 지하실을 봉쇄해 고양이들이 지하실에 갇힌 채 굶어 죽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충되는 두 가지의 가치는 단지 ‘다름’일 뿐 어느 한쪽이 ‘틀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 짓고 상대방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관점으로만 상황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한다. 타협점을 찾아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캣맘 또한 주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먹이를 줄 수 있는 방법, 이를 테면 생활구역에서 벗어난 정해진 장소에서 악취를 유발하지 않는 건조된 사료를 주는 방법 등을 고민해야 함은 분명하다.     







며칠간,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매일 쓰레기장 앞에 쭈그려 앉아 작은 틈새를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 일상이 되었다. 아마도 그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새끼 고양이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자발적으로 은색 눈동자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새끼라는 것은 아킬레스건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아닌 누군가의 새끼로 받아들여진다. 어미가 존재하지 않는 새끼에게는 더욱 진한 모성의 본능이 생긴다. 이 묘한 본능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매일 쓰레기장 앞에 쭈그려 앉게 만들었다.      





“냐옹아, 어디 있니.”


며칠 째, 냐옹이가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쓰레기장 틈새를 들여다보지만 그 안에 은색 눈동자는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제대로 먹고는 살까. 혹시 나쁜 사람이 잡아가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채운다. 엄마를 만나 어딘가에 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불안감이 일순 일렁인다.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냐옹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 세상에 불쌍한 동물, 사람들은 넘치고 넘친다고 말한다.





나도 안다.

이 세상에는 가엽고, 안쓰럽고, 슬픈 삶들이 한없이 넘쳐난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믿는다.

적어도 내 앞에 벌어지고 있는 누군가의 절망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작은 이타적인 관심이 쌓이고 쌓일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하게 바뀔 것이라고.





그나저나 냐옹아. 도대체 어디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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