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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ul 21. 2019

태풍을 지나갈 나의 남편에게.

파일럿 아내의 아주 쓸데없는 걱정.


“태풍 '다나스' 남해상에서 소멸…”


휴우. 인터넷 뉴스가 뜨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제5호 태풍 '다나스'가 20일 한반도 근처 해상에 도착하자마자 열대저압부로 약화되었다는 기사였다. 태풍이 열대저압부로 약화했다는 것은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태풍은 소멸했지만 남부 지방과 제주도 산지 중심으로 매우 많은 비와 강한 바람이 예상된다고 한다. 잠시 펴졌던 나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진다. 가슴 한편이 여전히 묵직하다.     








“호출이야.”

시아버지 생신 때문에 온 가족이 모인 상태였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회사로부터 갑작스러운 호출이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남편이 밥도 제대로 씹지 못한 채 서두른다. 바로 가야 한단다.      




파일럿은 스케줄 근무를 한다. 회사마다 다를 테지만 보통 전달 22일 경에 다음 달 스케줄이 나온다. 남편은 스케줄이 나오면 냉장고 옆에 붙여둔 대형 달력에 하루하루 스케줄은 적어 놓는다. 작년부터 일 년 스케줄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대형 달력을 냉장고에 붙여 두었는데, 남편은 매달 스케줄이 나올 때마다 빼곡히 자신의 근무 일정을 적는다. 나도 달력에 세 쌍둥이 어린이집 행사, 큰애 학교/학원 중요한 일정, 가족의 대소사, 나의 일 년 목표와 중요 일정 등을 기재해둔다. 이 달력이 우리 가족의 일 년 흐름표인 셈이다.     




남편이 다음 달 스케줄을 달력에 적기 시작하면 나는 그 곁에 딱 붙어 앉아 그가 써 내리는 스케줄을 심각한 표정으로 확인한다. 5박 6일짜리 비행 일정이 잡히면 숨이 막히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고, 주말 스케줄이 많으면 벌써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운이 좋게 휴일이 연이어 잡힌 달은 가족여행이라도 떠나야 할까 설레며 주책없이 기도 한다. 이미 그의 삶은 내 삶이 된 것 같다.     





결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받아들이는 과정, 그것이 바로 결혼이었다. 연인은 삶의 일부만을 나누며 나름대로 정제된 삶을 공유하겠지만, 부부는 하나가 된 삶 가운데서 한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걸어야만 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는 주욱 늘어진 마시멜로처럼 각자의 삶에 녹여 들어가 하나가 되었다. 그가 없는 날 독박 육아는 더욱 고되고, 그의 회식은 어느 날 밤의 외로움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서로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     






‘Reserve / Standby / 공항 대기’

달력에 RSV / STBY / 공항대기가 잔뜩 적혀있다. 스케줄이 배정되지 않은 날이라도 완전히 쉬는 날 (Dayoff) 아니면 하루 종일 대기를 해야 한다. 불려 나갈 확률에 따라 대기는 세 가지 타입으로 나뉘는데, Reserve <Standby <공항 대기 순으로 Reserve가 불려 나갈 확률이 그나마 낮은 편이다. (공항 대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항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적인 부분이기에, 남편은 대부분 하루 종일 핸드폰을 쥐고 다. 대기하는 날에는 외출도 자제하는 편이다. 외출을 하더라도 집 부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 차가 막히는 토요일 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하남 스타필드에 간 적이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회사 호출로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있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얼마나 마음 졸이며 집으로 왔는지, 결국 집에 오자마자 남편은 헐레벌떡 공항으로 튀어나가야 했다. 그 이후로는 대기하는 날에는 절대 집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다.     





“태풍 때문에 불려 나갈 줄 알았어.”

오늘은 Reserve였다. 불려 나갈 확률이 낮기에 다소 방심을 했던 나였지만 남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럴 것 같았다는 말을 투덜거리며 내뱉었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고 나무들은 이리저리 치이며 머리를 사납게 흔들어댔다. 남편은 태연하게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다. 손을 흔들며 활짝 웃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상상. 가끔씩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 이상한 두려움이 밀려온다. 해외에 도착한 남편의 연락이 늦어질 때면 불안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어느덧 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출/도착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은 나의 작은 습관이 되었다.      




“항공기 사고는 자동차 교통사고보다 훨씬 낮은 확률이야.”

불안감을 내비칠 때마다 남편은, 통계적으로 항공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번개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항공기 사고는 처참한 결과로 이어지기에 강렬하게 기억되는 것뿐이지 실제로 항공기 사고가 발생할 확률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나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지난 십 년  겪어왔던 남편 동료들 사고를.     





두 번은 군용 비행기가 추락한 사고였다. 신혼 초였는데 검은 양복을 입고 울먹이는 표정으로 집을 나섰던 남편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들은 남편의 일이 년 선배들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던 이십대의 청년들이었다.

세 번째는 몇 년 전 일어났던 민간 비행훈련원 사고였다. 2016년 초로 기억하는데 취업 직전 남편이 교관으로 근무했던 비행훈련원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그 기종은 남편이 몇 달 동안 조종했던 비행기였다. 당시 남편은 취업으로 인해 교관 근무를 그만두었던 상태였지만, 남편의 동료 중 한 명이 불운의 사고를 당해야만 했다. 사유는 비행기 결함이었다. 사고를 당한 동료는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랑이었다. 남편처럼 오랜 시간 공부하고 면장을 취득해 항공사 취업을 코앞에 앞둔 동료였다. 가족들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남겨진 가족의 슬픔이 선명하게 느껴져 나도 한참을 흐느꼈던 기억이 있다.  단지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일 뿐. 그들슬픔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었다.





파일럿은 화려한 직업이라는 말.

사람들은 파일럿을 화려한 직업으로 기억한다. 하루에 단 몇 시간 비행을 하고 고액 연봉을 받으며 마음껏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 그러나 파일럿의 아내로서 지켜본 그의 삶은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다. 고된 비행은 몸을 상하게 했고, 하얗던 피부는 자외선으로 인해 시커멓게 그을리고 기미가 생겼다. 뒤바뀐 시차로 인해 항상 피로함을 느끼고 아주 가끔씩은 억지로 자기 위해 잠이 오는 약을 먹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하고, 분기에 한 번씩은 시뮬레이션 테스트에 합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직업은 하나도 없다.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 뒤에 어두컴컴한 쓸쓸함은 어쩌면 모든 직업이 껴안고 있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남편은 활짝 핀 꽃송이 같은 미소와 함께 강하게 일렁이는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을씨년스러운 하늘을 바라보며 남겨진 자는 초조하게 그의 안녕을 빈다.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핸드폰으로 손이 간다. 아마도 그의 연락이 올 때까지 오늘 밤은 뒤척이게 될 것 같다.




안타까운 사고가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비행기든, 자동차든, 수많은 어린 목숨을 앗아간 배 안이든. 어느 곳이든 간에 안타까운 죽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쓸쓸한 죽음을 더욱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단지 운이 없었던 세상의 모든 사고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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