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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Sep 16. 2019

제수씨, 당신을 무어라 부르오리까.

가족 간 호칭 문제에 대한 은밀한 고백.


결혼 전 남편의 형을 처음 만나던 날, 그날은 새하얀 눈이 펑펑 내렸던 어느 겨울이었다. 부모님에게 결혼 허락을 받기 전 형에게 따로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남자 친구의 말에 시댁 앞 커피숍에서 그의 형을 기다렸다. 말끔한 슈트에 조끼까지 갖춰 입은 그의 형이 나타나자 이상하게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남자 친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형이 나를 따로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형과 단둘이 커피숍에 앉아 어색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긴장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는 앞으로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라는 말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엄격했고 냉정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처음부터 존대를 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그 의도가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것인지, 아님 내가 그 정도로 쉽게 보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실 그는 육 년간을 교제했던 연상의 여자 친구와 심한 결혼 반대를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내가 나타나 임신을 하게 되어 먼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그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사건이었다. 시어머니는 이따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친정에서 언니를 제치고 결혼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적은 없었으나, 시댁에서 그것은 마치 죄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그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이것저것을 쉴 새 없이 묻는 그의 모습과 딱딱한 자세로 앉아 또박또박 답변하는 나의 모습은, 흡사 심층 면접장을 방불케 했다. 커피숍을 나오며 온몸에 진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 실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인사해야 하나, 나의 언니와 남자 친구의 첫 만남은 이렇지 않았는데. 편안하고 친근했는데.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시댁은 친정과 정말 다른 문화였다. 남편은 삼남 중 막내였고, 나는 삼녀 중 둘째였다. 그래서인지 친정과 시댁은 공기의 밀도부터 달랐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친정과는 달리, 시댁은 발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고 적막이 흘렀다. 친정의 공기는 가볍고 경쾌했지만 시댁의 공기는 차분하고 무거웠다. 식사시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음식을 씹는 소리, 삼키는 소리,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기침소리 등이 어우러져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작고 섬세한 소리들이 내 귓가에 예민하게 부딪힐 때마다 나는 야릇한 긴장감을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조차 없는 중압감.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시댁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명치 한 켠이 답답해지는 체기를 느꼈다.      







“아주버님.”

나는 결국 그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결혼을 코앞에 둔 시기에 그것도 친근함조차 느낄 새도 없었던 누군가를 오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른들이 보시기에 염려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혹시라도 어른들 눈에 좋지 않게 보일까 싶어 남편에게조차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마도 아주버니는 나에 대한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부분 그는 나에 대한 지칭 대명사를 생략하고 말을 건네거나, 가끔씩은 ‘너’라는 표현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시어머니 아주버니 등짝을 때린 이 있었다. 너가 뭐니. 너가.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문제에 대해 뱉은 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아예 지칭 대명사를 생략하기를 선택했다. 최대한 나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와 나는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편하게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누구보다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가끔씩은 그런 그의 모습에 화가 솟아올랐다. 서로에 대한 적당한 호칭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가족으로서 상호 간에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제수씨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OO 씨라고는 불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때마다 집안에 괜한 불협화음이 날까 걱정되어 남편은 형에게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시어머니 또한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며느리에 대한 역할은 무수했고 그 역할을 해나가기 위해 나는 진땀 나게 버둥거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며느리 자리에 충실했고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역할만 강요될 뿐 가족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최소한의 존중감은 보호되지 못했다. 모두들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자연스럽게 외면하는  같았다. 과연 내가 아주버니에게 당신이라고 했다면 집안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아마도 나는 천하의 대역죄인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데 그와 나의 호칭은 아직도 어정쩡한 형태로 남아있다. 


결혼 초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괜한 자존심과 결부해 생각하고 그 안에 감정을 실었다. 변화될 수 없는 현실 안에서 매번 그것은 나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무시받는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동안 집안 곳곳에서 야기된 크고 작은 호칭 문제를 겪으며, 그 일을 바라보는 나의 각은 조금씩 변화되었다. 어쩌면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기 전에 호칭 자체에 대한 문제였다 걸, 깨닫게 되었다.


그가 나에 대한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한 이유를 아주 조금은 이해하겠다. 고지식하고 숫기 없는 그의 성격에 도저히 제수씨라는 말이 어색해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에게는 나를 무시하거나 내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어색한 호칭을 사용하기가 도저히 힘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호칭 문제는 우리 집안 곳곳에서 빈번히 발생되었다. 형님이 남편을 서방님으로 부르는 부분에서도 일어났고, 남편이 열 살이나 어린 형부에게 형님으로 부르지 않았던 부분에서도 일어났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하자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런 문제들이 일어나고 흐리멍덩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물에 탄 아이스크림을 들이켜는 것처럼 맹숭맹숭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하는 아주버니와, 남편에 대한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하는 형님과, 열 살이나 어린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지 않는 남편의 모습은 어딘가 많이 닮아 있는 듯했다.






제수씨, 아가씨, 올케, 아주버니, 처남, 처제, 아기씨, 형님, 질부, 시댁, 처가...


결혼과 관련된 가족 간의 호칭에는 과거 신분제도에 대한 잔재가 남아있다. 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지만 호칭은 아직도 조선시대 어딘가에 그대로 멈춰있는 것 같.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고르지 못한 느낌이.


어색한 호칭, 그래서 서로 간에 부르지 않게 되는 호칭은 경험처럼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아마도 아주버니가 처음부터 나를 OO 씨라고 편하게 부를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있는 집안 분위기였다면, 그것에 대해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내가 지난 시간 이 별것도 아닌 일에 대해 마음이 상하고 상처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도 홀가분했을 것이다.




쓰지 않는 호칭은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 상대를 지칭하지 않고 어색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그 시대에 맞게 서로가 편하게 지칭할 수 있다면 그게 더욱 합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서로 간에 불편한 호칭을 억지로 뱉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의 표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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