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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Sep 26. 2019

또 임산부로 오해받았다.

이 배는 그냥... 똥배라고요.....


가끔씩 난감한 순간이 있다. 상대는 호의로 한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불쾌한 감정은 휘발되지 않는 그런 상황, 보통 나는 지하철에서 그런 일을 겪고는 한다. 긴가민가하며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슬며시 묻는 것도 아니다. 임산부 좌석 앞에 서있는 나를 보더니 그대로 벌떡 일어서는 경우가 대다수다. 한 번은 임산부 좌석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이리 와서 앉으라며 나를 부른 적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 사람은 임산부가 확실합니다!’라는 분명한 몸짓이었다. 물에 콜라를 탄 듯 뜨뜻미지근한 나의 표정을 읽은 상대는 되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 그녀도 나도 대략 난감한 상황이었다.    



 

“저 임산부 아닌데요.”

처음에는 웃으며 대답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출산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불쾌함보다 말을 건네준 이의 마음 씀씀이에 먼저 감동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후 비슷한 경험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분명 상대는 나를 위해 호의를 베푼 것이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미묘한 패배의식이 솟구쳤다. 아님, 삼 년이 지나도록 불쑥 솟아있는 내 배에 대한 원망에 가까운 그런 복잡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착잡하고도 뒤숭숭한 기분이 가슴속을 후비고 파고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며칠 전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지하철에 올랐는데 임산부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한분이 나를 보고는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선 그녀를 보자 순간 당황이 되었다. 호의로 가득 찬 따뜻한 배려였지만 입술에 경련이 일어남과 동시에 씁쓸한 웃음이 허탈하게 새어 나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 아주 소극적인 몸짓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지금 보시는 이 배는 그냥... 똥배라고요...’

입 밖으로는 감히 내뱉지 못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채웠다. 그리고는 체념에 가까운 눈빛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러운 나의 미소를 간파한 그녀는 재빠르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찰나의 순간 주변의 수많은 눈빛들이 내 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저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배에 힘을 주어보았다. 그러나 헐렁한 배는 다시 출렁이며 금세 밖으로 삐져나왔다. 풀쑥 솟아오르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지하철 유리문에 비친 내 몸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유리에 비친 남루한 몸뚱이는 누가 보아도 D라인이었다.     



 

매일같이 운동을 한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몸뚱이는 부동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시간의 법칙은 오직 나의 배에만 다르게 작용한 것 같다.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루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성장해왔는데, 그래서 지금은 제법 아기 테를 벗고 네 살 어린이가 되었는데, 오로지 나의 배는 시간을 역행하여 그 시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가끔씩은 미스터리였다. 이 미스터리는 세 쌍둥이를 출산한 다음날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뱃살을 발견했을 때, 어째서 아기 몸무게만큼도 몸무게가 줄어들지 않았을까 원망하며 체중계 위에 올랐을 때 느꼈던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일 년 간 매일 운동을 하는데도 왜 내 배는 마치 뱃속아이라도 있는 것처럼 점점 커져만 갈까. 이번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은 여전히 내게 납득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았다.




어느새 나의 몸은 누가 보아도 퍼질러진 아줌마의 몸뚱이가 되었다. 나의 얼굴에는 어느새 기미가 잔뜩 올라왔고, 목에는 선명한 주름이 생겼으며, 무릎과 허리에는 관절염과 디스크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거기에 여전한 D라인의 배까지, 누가 보아도 푸근하고 정감 가는 몸매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거리를 걸을 때마다 쇼윈도에 비친 나를 바라보기가 두려운 마음이 일렁인다. 정면으로 나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이상하게 눈물이 차오르고는 다. 거울 안에 비친 나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 나의 마음은 여전히 생기 넘치던 이십 대 언저리에 있는데, 나의 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서글프다.




  


“엄마 곰은 뚱뚱해. 아빠 곰은 날씬해. 아기 곰은 너무 귀여워!”

곰 세 마리라는 노래를 처음 배웠을 때, 아이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노래의 가사를 바꿔 불렀다. 가끔씩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롱을 떨며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은 어김없이 이 노래를 선택하고 목청이 터지도록 크게 부르고는 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았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은 모르고, 아이들은 아주 해맑게 엄마 곰은 뚱뚱하다고 노래했다. 바뀐 가사를 알아차린 친척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장대소하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 씁쓸한 미소를 뱉었다. 



사실 아이들은  뱃살의 유일하고도 열렬한 이다. 아이들은 엄마의 뱃살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틈만 나면 나의 티셔츠 속으로 얼굴을 푹 집어넣고 뱃살을 조물거린다. 티셔츠 속에 서로 먼저 얼굴을 넣겠다고 다투기도 하고, 잠을 잘 때는 엄마 배에 얼굴을 갖다 댄 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엄마 배는 부드럽고 푹신푹신해!”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엄마 배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엄마 배에 지그시 누워 뱃살을 조물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이 뱃살도 나름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을 위한 심리적 안정감의 기능이라고나 할까. 가끔은 아이들을 재우는 기능까지. 내 뱃살에는 아주 특별한 기능이 탑재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 아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내 주위로 모여든다. 엄마의 푹신한 뱃살을 조물거리며 아이들은 아기 토끼처럼 내 품을 파고든다.

'그래. 이 뱃살도 나름의 기능은 있으니까..'

나는 그동안 빼지 못한 게 아니라 빼지 않은 거라고, 애써 자기 위안을 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러나 얼마 전의 부끄러웠던 기억이 이내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러 생각이 뒤엉킨다.

'정말 임산부 같았을까.'

'혹시 헐렁한 옷 때문은 아니었을까.'

'에휴...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해야 하나.'


소심한 O형의, 괜스레 뒤숭숭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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