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대화 중 한 번쯤은 꼭 고생 배틀이 펼쳐진다. 너도 나도 응급실에서 하룻밤에 몇 명의 환자까지 진료한 적이 있다, 병동에서 한 번에 몇 명의 환자까지 주치의를 해본 적이 있다, 당직 때 몇 시간까지 잠을 못 자고 일한 적이 있다, 몇 명을 동시에 CPR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갑질까지 당해봤다, 등의 무용담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마도 의대생 시절 가운은 입었지만 병원을 돌아다니기에 왠지 민망하고 풀 죽어있던 마음들이 비로소 면허번호를 가지고 정당하게 병원의 한 역꾼으로써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치환되면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짜릿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처음으로 주치의를 시작하면 드디어 나도 환자를 책임지고 있다는 남다른 뿌듯함과 자부심이 샘솟다가도, 첫 사망환자를 경험하면 각자의 성격에 따라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언젠가는 경험해야 할 고난을 결코 경험하고야 말았다는 비장함을 내비치고, 누군가는 담담하고, 또 누군가는 안쓰러울 정도로 괴로워한다.
오늘 연구실에는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연구원으로 일했다던 한 친구가 옛 동료들에게 인사하려고 찾아왔다. 이란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이곳 캐나다의 연구실에서 연구 경력을 쌓으면서 동시에 미국 의사시험을 준비해 올해부터는 미국의 어느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매칭 되어 근무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 친구는 옛 연구실 동료들에게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한 최근 사 개월 동안의 경험담들을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담당 교수들 중 끔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쉬는 날에는 동료들과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재미있게 노는지, 얼마나 많은 환자를 동시에 담당해야 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더니, 그동안 경험한 사망환자들의 사연들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어느 30대 췌장암 환자에게는 아이가 둘이나 있었고, 어느 백혈병 환자는 아무리 혈소판을 수혈해도 수치가 오르지 않다가 결국 뇌출혈이 생겨 뇌사로 진행하였다는 등. 자신은 그 남은 유족들과 함께 부둥켜안은 채 엉엉 울었으며 너무 운 나머지 유족들이 그만 울라고 할 정도였다는 것을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제법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타국의 한참 어린 후배 의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자니 이제 막 시작한 전공의 생활에 대한 흥분과 몰입이 장하고 기특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라떼를 홀짝이며 역시 한국 병원만큼 빡센 곳은 없군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사망 환자의 경험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큰 생경함을 느꼈다. 연이어 나의 사망 환자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병원에서 환자의 죽음에 대한 감상적 반응은 어쩌면 암묵적 금기이다. 최대한 사망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한 환자의 사망은 다음날 아침 회의에서 ‘아무개 환자, 금일 퇴원 예정입니다. 아무개 환자, 전일 XX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아무개 환자, 오늘 OOO검사 예정입니다.’와 같은 사건의 나열에 한 줄 끼어들어간다. 소식이 전해지는 장내에서는 약간의 한숨과 침울함이 맴돌 뿐, 감정을 분출하는 이는 없다. 첫 사망을 꺽꺽대며 보고했던 날, 누군가는 위로를 해주리라 생각했는데 윗년차 선생님 한분만이 눈물을 닦아 주었을 뿐, 다른 선배들은 왜 네가 우냐며 답답해하기도, 그저 귀엽게 바라보며 곧 익숙해질 거라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 곧 프로페셔널하지 못함을 증명한 것 같아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밀려왔고, 그 후로는 죽음 앞에서 마치 담대한 척, 익숙한 척, 일상인 척 행동했다. 사실은 그러지 못하면서도.
신경과는 사망이 잦은 과는 아니다. 일시적 두통이나 어지럼증 같은 경증질환도 많고, 뇌졸중이나 뇌전증지속상태와 같은 신경과의 초응급질환이라 하더라도 심폐기능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경과에서 온전히 진단부터 사망까지를 지켜보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신경계 질환 자체가 매우 중증인 경우나 치매, 파킨슨병과 같은 노인성 질환들에서 병발한 폐렴, 심근경색, 폐색전증 등의 합병증은 순식간에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 매일 같이 사망 선고를 할 수밖에 없는 응급의학과, 중환자의학과, 종양내과라면 차라리 타성에 젖어버리기라도 할 텐데, 이렇게 가끔 마주하는 죽음은 늘 황망하다. 신경과에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신경계의 손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장기간 어려웠던 경우가 많다. 이미 환자와의 유의미한 소통이나 감정의 공명을 경험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가족들도 담당의도 어느 정도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편이다. 오히려 드물게 간혹 경증의 신경계 증상으로 입원해있다가 다른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경우 아주 잠깐 만났던 환자라도 유난히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이들이 있다.
중환자실 주치의이던 이년차 때였을 것이다. 할아버지 한분이 기관지확장증이 있던 중에 폐렴이 생겨 호흡기내과에 입원해있다가, 폐렴은 모두 좋아졌으나 아주 작은 뇌졸중이 생겨 신경과로 전과되었다. 더 이상 폐렴도 없고, 뇌졸중도 거의 증상이 없을 정도로 작았던 터라 그다지 불편함이 별로 없는데도 중환자실에 있는 것을 민망해했던, 아주 귀여운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하루만 지켜보고 일반 병동으로 전실을 할 예정이었기에 나도 마음을 놓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오후 다섯 시쯤께였을까, 할아버지가 갑자기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좋아졌던 폐렴이 다시 생겼다. 원망스럽게도 폐렴의 증상은 불길처럼 번져 할아버지의 숨은 점점 더 가빠지기 시작했다. 신경과 이년차였던 나는 신경계의 문제도 아닌 폐렴을 척척 해결할 자신이 없었다. 폐렴이 기껏 다 좋아졌다가 하필이면 손톱만 한 뇌졸중이 생겨 신경과로 전과를 왔더니만, 폐렴이 도로 생겨 언제 뺄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기도삽관을 해야 한다 하면 환자와 보호자의 원망을 잔뜩 들을 것만 같았다. 라인을 잡고 처방을 남발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제발 현상 유지하며 퇴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속으로 기도해 보아도 할아버지의 숨은 속절없이 가빠져서 그저 보고만 있기에도 내 숨이 찬 지경에 이르렀다. 중환자 교육을 받을 때 누군가가 기관삽관을 해야 하는 적절한 타이밍이 언제냐고 질문했을 때 강의를 맡았던 내과 고년차가 교과서에 따르면 호흡수, 혈중 이산화탄소 등에 따른 이런저런 기준들이 있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면 ‘아, 지금 안 하면 X 된다’라는 느낌이 오는 때가 있을 거라 했다. 바로 그런 때였다. 누가 보아도 할아버지의 에너지가 한 번의 숨, 두 번의 숨마다 명백하게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원망을 들을 거라 멋대로 예단해버린 나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다급하게 그러나 교묘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폐렴이 다시 생겼는데, 지금 상태로는 숨이 너무 차서 곧 있으면 진이 다 빠져버려서 숨을 아예 못 쉬게 될 것 같아요. 좀 재워드리면서 기도 삽관을 해 기계로 호흡을 도와드려야 편하실 것 같아요. 우리 같이 잘해봐요, 네?” 원망을 들을 거라는 나의 섣부른 예상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편해질 수 있다는, 잘해보자는 나의 말에 결의에 찬, 기어코 비장하기까지 한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순간 빛나던 할아버지의 눈에 나는 마치 할아버지와 전우애 비슷한 것이 싹튼 것 같았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직접 동의서를 받고 행여라도 할아버지의 숨이 넘어갈까 보호자에게는 전화로 대강 설명을 한 뒤 허둥지둥 기도삽관을 했다. 교대 시간이 지나 그날의 당직인 동료에게 인계를 한 뒤 좀 더 할아버지를 지켜보다 갈까 고민을 했지만 나는 결국 퇴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몇 시간 뒤 사망했다.
우리 같이 잘해봐요.
내가 퇴근한 후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다음날 아침 출근하고서야 알게 도었다. 대개는 평화롭고 조용한 중환자실은 한 명의 환자라도 위중한 상황에서는 아수라장이 된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안 좋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소란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불길할 정도로 중환자실은 평화로웠다. 당직자였던 동료가 간 밤의 일을 알려 주었다. 기저의 기관지 확장증 때문에 수십 차례 반복되었을 폐렴은 이번에는 소생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 (Acute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으로 진행했고, 몇 번이나 폐렴으로 중환자실을 오고 갔던 만큼 보호자들은 제법 의연하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동료는 굳이 알려주려 새벽에 전화해 깨우지 않았다는 배려를 생색내고는, 밤 사이의 사투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터덜터덜 당직실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나였다는 것을. 나는 할아버지는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지만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눈은 불안으로 흔들리는 나의 눈이었다는 것을. 사실 할아버지에게 ‘제가 최선을 다할게요’가 아니라 ‘우리 같이 잘해봐요’라 했던 것은 나 혼자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할아버지도 잘 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은근슬쩍 책임을 나누려던 내 비겁한 무의식이었다는 것을. 후회가 몰려왔다. 할아버지의 의식이 온전할 때, 허둥지둥할 그 시간에, 보호자를 만나게 해주었어야 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오늘 처음 만난 불안에 떠는 어느 전공의가 되게 해서는 안되었다. 내 담당 환자였으니 몇 시간 더 늦게 퇴근하더라도 동료와 힘을 합쳤어야 했다. 당직실로 돌아가는 동료의 뒷모습까지 아직 생생한 것은, 죄책감과 후회가 물밀듯이 쏟아져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이 시시한 고백은 의학 드라마에 나올 법한 가슴 절절한 환자의 사연도 아닌, 대단한 진단과 치료의 서사도 아닌, 그저 벌써 십 년쯤 지난 초보 의사 시절의 부끄러운 하루의 기억일 뿐이다. 할아버지 전후에도 여럿의 사망 환자들이 있었지만 희한하게 이름도 나이도 기억나지 않는 겨우 반나절을 함께 했던 할아버지의 기도 삽관 전 총총한 눈빛이 지금까지도 때때로 송곳처럼 나를 찌른다. 이란 친구처럼 사망 환자에 대한 감정을 편히 드러낼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그들에게 남아있는 미안함과 후회를 다시 들춰내는 것이 이렇게나 쓰라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원을 떠나 조금은 감상적이 되어도 된다고 스스로 허용한 지금, 할아버지를 애도하며 그가 내 머리속에 남기고 간 눈빛의 의미를 가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