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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 Dec 16. 2022

할머니의 갓생

사망 환자의 기억 둘

입원환자 경과기록 작성의 기본은 SOAP이다. S에는 환자의 주관적 증상 호소를 적는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을 대부분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없거나 진정제의 효과 아래에 있으므로 S는 대개 '…'으로 기록된다. O에는 지난 경과기록에서 새로이 업데이트된 검사 기록들을 붙여 넣는다. A에는 이 환자에게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기관이 어디인지와 그 문제를 파악해 1번부터 N번까지 작성한다. 복잡한 중환의 경우는 N이 20도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P에는 1부터 N까지 각각의 번호에 대한 진단적 계획과 치료적 계획을 작성한다. 그러니 결국 경과기록을 통한 시선이란 환자를 ‘최대한 각자의 기능을 보존해야 하는 뇌, 폐, 간과 같은 기관들이 피부라는 또 다른 기관에 둘러싸여 있는 집합체’로 바라보게 할 때가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마주할 때 늘 크고 작은 꾸밈을 한다. 학교에 갈 때 직장에 갈 때, 사람들은 말끔히 씻고 머리를 단장하고 화장을 하고 적절히 포멀한 옷을 선택해 입는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에는 더 신경 쓴 꾸밈을 한다.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는 길에도 외투를 걸치고 립스틱을 바른다.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더라도 적어도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옷을 입는다. 반면 병원에서는 각종 검사를 위한 편의와 응급상황을 피해 속옷 착용을 지양한다. 화장도, 예쁜 옷도, 속옷조차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의 인간에 가까워진다. 중환자실 환자들은 대개 그들이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 나와 대면하게 된다. 그들의 평소 얼굴 표정, 말투, 습관 같은 것들은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눈앞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기관의 집합체와 나 사이에 한 겹의 환자복의 경계뿐인 것이다. 그러다 간혹 면회를 온 보호자들이 환자의 건강하던 모습의 사진을 보여주거나 심지어 서류 작성을 위해 제시한 환자의 신분증의 사진이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젊은 환자들의 불과 얼마 전까지도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라거나 오래 와상상태로 지내던 노인 환자들의 젊고 건강하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그래, 환자이기 전에 사람이지, 그제야 환기하는 것이다. 이 분에게도 젊고 찬란하던 시절이 있었지 가족과 함께 웃고 울던 시절이 있었겠지.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하던 시절이 있었겠지. 노래하고 춤추던 날들이 있었겠지.


어느 병원의 조교수로 재직하던 중 어느 당직날 다른 교수님의 담당 중환자실 환자가 숨차 한다는 노티를 받았다. 중환자실로 내려가니 왜소한 할머니가 모로 누워 작은 몸을 말고 숨을 가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원인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환자는 만성적인 심장질환이 있었고, 그 심장질환에서 기인한 작은 뇌졸중 때문에 신경과에 입원해있었다. 뇌졸중 자체는 아주 작아 거의 증상이 없었던지라 급성기 하루 이틀만 지나면 일반 병동으로 전동을 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만성적인 심장질환이 입원해있던 와중에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기존에 만성심부전, 심방세동에 관상동맥질환까지 모두 있었던 환자였으나 평소에 병원을 열심히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 꼼꼼히 관리받지 못했고, 입원해 있던 와중에 심부전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었다. 그렇게 그 순간 가여운 할머니는 한 겹의 환자복에 둘러싸인 심장이라는 1번 문제와 2번으로 밀려난 뇌를 포함한 기관의 집합체가 되었다.


평소 담당하던 환자가 아니었는데 당직 중에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니 할머니에게 자세한 것을 물을 틈은 없었다. 담당 간호사가 이야기 하기를, 할머니는 입원하는 순간부터 빨리 퇴원해서 딸을 보러 가겠다는 말을 계속해왔고, 치료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계속 보였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했다. 그래서 기도삽관이나 승압제 사용과 같은 적극적인 중환자 치료를 원할지 잘 모르겠다고, 그리고 그것을 상의하거나 설득할만한 가족도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할머니가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 거리는 모습은 그저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괴로운 광경이다. 다시 한번, 어느 고년차가 알려준 ‘아, 지금 아니면 X 된다’의 순간이다.  일단은 자세한 것을 물을 틈이 없이 할머니에게는 ‘지금 숨이 너무 차서 기도삽관을 해서 숨 쉬는 걸 도와드리고, 좀 쉬게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편하게 주무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이번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느 할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리며 ‘같이 잘해봐요’라는 비겁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의 이 년 차 전공의는 이제 나름대로 교수가 되어있었으므로. 기도삽관 외에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나의 미안한 마음과 중환자 치료를 원치 않을 것 같다는 간호사의 기우와는 다르게, 할머니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편히 쉴 수 있다는 말이 그리도 반가웠을까. 일단은 기도삽관을 하고 어느 정도의 상황을 정리한 뒤 가족 사정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간호사들은 어느 정도의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간호뿐 아니라 식사와 대소변 갈이 같은 간병, 면회, 주차, 병원비 같은 원무의 영역까지 다 커버해야 하니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참 존경스럽다. 간호사들이 수소문을 하여 환자에게는 장애를 가진 채로 태어나 평생을 와상 상태로 살아온 지적 장애의 40대 딸이 있고, 지금 의사소통이 가능한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은 집으로 방문하는 딸의 장애활동지원사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담당 간호사가 연락처는 간호정보조사지에 입력해 놓았으니 연락을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간호정보조사지를 여니 환자의 딸 이름이 아주 근사한 영어 이름이다.  와, 40년 전에 지은 이름치고는 너무나 세련되었네, 생각하며  활동지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활동지원사는 친인척도 아닌, 그리고 담당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담당 장애인의 어머니의 치료계획 수립에 자신이 결부된다는 것을 매우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할머니와 딸의 사연을 속사포처럼 조금의 자랑과 찬탄을 담아 알려주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유복한 집에서 자라 모두가 알아주는 여대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당시 외국인과 연애결혼을 하여 혼혈의 중증 장애아를 낳은 것이 크나 큰 흠이 되어 가족과 연이 끊겼다고 했다. 연이 끊긴 가족 중에는 사실 초록창에 이름을 검색하면 맨 위에 나오는 고위직 인물도 있다고 활동지원사에게 비밀스레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과도 곧 이혼을 했고 남편은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평생을 어렵게 살았지만 늘 멋쟁이였고, 딸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늘 딸만 보고 살았고, 딸과 함께 있으면 엄마도 딸도 함께 웃고 즐거워했다고 했다. 딸도 엄마를 무척 좋아해서, 엄마가 없으면 엄마를 계속 찾기 때문에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고 했다. 그제야 할머니가 입원하자마자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어쨌든 연이 닿는 가족은 없었기에 할머니는 의학적 지침에 따른 모든 가능한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고백컨대 나는 그 과정에서 이 중환자 치료가 속절없이 길어지면 어떡하나를 걱정했었다. 수주에 걸쳐 할머니의 상태가 좋아진다고 한들, 중환자실의 엄청난 비용을, 장기간의 중환자실 체류로 생길 합병증들을, 할머니가 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딸은 그동안 그리고 그 후에는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그럼 나는 어디까지 무엇을 해야 하나. 그것을 내가 결정할 권한이 있긴 한 건가. 그러나 이런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함께 당직인 타과 교수님들의 도움을 총동원해가며 온갖 승압제를 동원하고 수액을 들이부어도 혈압은 하염없이 떨어졌고 할머니는 몇 시간 뒤 사망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새벽 2시쯤, 딸은 거동이 불가능해 방문할 수 없었기에 딸의 활동지원사 만이 중환자실에 방문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아 주었다. 나와 간호사들과 활동지원사 함께 그녀의 두 발에 곱게 칠해진 매니큐어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자세한 사연을 전해 들은 간호사들은 꼼꼼히 칠해진 매니큐어를 보고 멋쟁이였을 줄 알았다며, 어쩐지 할머니 외모가 남달랐다며, 젊었을 때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 같다며 감탄을 하였다. 꼭두새벽이라도 담당 장애인의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좋은 활동지원사가 마침 딸 곁에 있었다는 것이 그녀를 조금 안심시켜 주었을까? 아마도 할머니는 자신의 투병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딸이 더욱 힘들어질 것을 알고 이 세상을 지체 없이 훌훌 떠나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들은 것들은 모두 할머니에게서 활동지원사로, 활동지원사에서 나에게로 전해진 이야기이기에 어느 정도의 각색과 뻥튀기가 섞여있을지 그리고 이야기 너머에는 결코 아름답지 못할 속사정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전해진 만큼의 그녀의 삶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불행이 너무 안타까워서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녀가 불행했다는 나의 판단이 섣부른 예단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인생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물질적 풍요와 원가정과의 연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몇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딸을 선택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딸이 40이 넘을 때까지 함께했다. 그때까지도 딸과 엄마는 서로 사랑했다. 함께 있을 때 자주 웃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감히 속세의 기준으로 그녀의 삶이 불행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어느 당직 날, 해가 진 후 그다음 해가 뜨기도 전에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일들과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영화화되어버린 그녀의 삶과 선택은 너무나 주체적이고 멋진 ‘갓생’이다.


곧 병원을 퇴사하고 캐나다로 떠난 나에게 이렇게 길게 울림을 주고 있는 그녀의 삶의 기록은 지금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 장례를 치러 주거나 유품을 보관해줄 가족이 없었으니 추도문도 없었을 테고, 일기나 메모도 남아있지 않겠지. 할머니에게 잠시 스쳐 지나간, ‘기도삽관해도 될까요?’라는 한마디 말밖에 나누어 보지 못한 내가 감히 그녀의 삶을 기억하고 기록한다고 전하고 싶다. 기도 삽관 전, 따님과 영상통화라도 잠깐 시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다. 그녀의 신분증 사진 한번 본 적 없지만, 이미 내 마음속 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할머니의 젊었을 적의 노래하고 춤추던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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