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승호 Mar 20. 2024

은퇴 후"명동"


며칠 전 기분 좋은 문자 하나를 받았다. 서울중앙 우체국에 있는 본부에서 시상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상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다. 7년 전 서울시장상 받을 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아직도 건재하다는 마음에 설레고 기뻤다. 퇴직자들에겐 대통령 상이 주어지고 저와 같은 촉탁직에게는 본부장 상이 수여되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나니 오후 3시 40분이었다. 귀가시간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세밑에 혼자서 명동거리를 돌아보는 것도 옛 추억을 되살리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만 같아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명동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명동! 10여전에 슬쩍 지나간 적은 있어도 마음먹고 구경해 본 지는 결혼 후 처음인 것 같다. 서울에 살면서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왔다는 것은 삶이 추억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앙 우체국에서 예술 극장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과 잘 다녔던 잉글랜드 제화점이 있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물론 잉글랜드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부근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그 시절 양가죽(일본 말로 "기 또"라고 많이 불렀다)으로 만든 노란색 구두를 즐겨 신었다. 밑창이 소가죽이어서 신발이 가볍고 부드러워 고급 신발에 속했다. 그 노란색 구두는 밤색 구두약으로 닦으면 연한 갈색으로 변하면서 신을수록 싫증 나지 않고 폼 나는 구두였다. 주머니는 빈털터리인데도 폼 잡는다고 푼돈을 모아 꼭 사 신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 친구들은 모두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시 옛 코스모스 백화점 쪽으로 나와 예술 극장 앞으로 갔다. 그때는 예술 극장 주변과 로얄호텔 맞은편에 다방들이 많았다. 아마 성당과 코스모스 백화점 중간지점이 되어 만나기 좋은 위치 때문이었을 것 같다. 다방에서는 물론이고 예술 극장 맞은편 코너 1층 상가 음반 판매 가게에서는 그때 유행하는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항상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그 노랫소리에 모두들 흥겨워했을 뿐만 아니라 명동에 왔다는 자부심도 느끼기도 했다. 다방마다 밖으로 스피커를 설치해 음악이 흘러나와도 주변에서 시비를 걸지 않고 서로 즐겼으니 명동은 관대하고 배려 깊은 동네였던 것 같다.


 예술 극장 앞에서 잠시 머무르다 성당부터 보기로 하고 올라갔다. 시골에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상경하여 성당 입구 맞은편 옷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친구도 만나보고 명동에도 가 볼 겸 왔던 곳이다. 성당 입구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달라졌는데 내 친구가 점원으로 있었던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그때 친구와의 만남이 생각나서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는 미성년자도 취업이 가능했을 때였다. 그 친구는 지금 잘 살고 있다. 


 성당을 바라보며 사진 한 컷을 찍고 돌아서 내려오다 또 한 번 놀랬다. 올라올 때는 무심코 지나왔는데, 예부터 버스킹 하던 자리에 구세군과 드럼 폰 그리고 색소폰이 함께 공연을 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도 똑같았다. 


 다시 명동 중심부로 내려오면서 내가 잘 다녔던 로얄호텔 맞은편 2층 다방 건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상호는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과 모여 명동의 추억이 시작되던 곳이었다. 그때는 담배도 유행을 탔는데 다방 탁자 위에 다른 사람 보란 듯이 유행하던 담배를 올려놓고 으시대며 차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  담배가 품절 사태가 자주 일어나 사람들이 사재기도 하고 그랬었다. 그리고 의자도 소파처럼 편안한 디자인으로 제작되어 푹신했고,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고 담배도 피워야 멋있어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하다가 다방 탁자를 엎은 적도 종종 있었다. 또 커피는 설탕 없이 마셔야 수준 있어 보인다고 쓰디쓴 블랙커피를 억지로 마신 적도 있었다.


 아~ 또 "코리아 타임"이라고 약속시간에  늦는 사람 때문에 생긴 은어도 생각이 났다. 만남에는 꼭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핸드폰이 있어 좋지만 그때는 기다림에 속이 터졌다.


 좌측으로 돌아 명동칼국수 등이 있었던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옛날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들이 쟁반을 이고 들고  부딪칠까 봐 가요가요하면서 조심조심 음식 배달하던 아슬아슬한 골목의 맛은 사라지고, 건물들이 깨끗이 단장되어 외국 브랜드의 커피점과 패스트푸드점 그리고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골목에 빨대가 꽂힌 1회용 컵을 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거나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리고 가게 안의 실내장식이 훤히 들여다보이면서 안과 밖이 조화를 이루며 거리는 세련돼 보이고 확 트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서운했다. 그때처럼 여러 음식점에서 나오는 냄새와 연탄가스 냄새가 배어 있는 그런 골목 이 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자기 고향이 개발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다시 우측으로 돌아 명동 메인 도로로 가는데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들어서니 옛날의 명동 분위기가 아니었다. 병원, 양복점, 전당포, 구두점, 양장점, 이발소, 미장원, 화장품 가게, 옷 가게, 잡화상회 등은 기대 안 했지만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먼저 거리가 깨끗하면서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었고, 조명은 밝으면서 은은했다. 나 때는 반짝이면서 화려했는데, 분위기가 조명을 바꾼 건지 조명이 분위기를 바꾼 건지 아무튼 다시 보는 명동은 아름다웠다. 상가에는 화장품 매장과 유명 브랜드 대리점들이 주를 이루고 간판들도 거리의 특성에 맞게 멋을 부려 놓아 나도 모르게 매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길 가운데는 퓨전음식과 패스트푸드 파는 포장마차가 있어 보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을 동시에 주는 것 같았다.


 나 때의 명동 거리는 온갖 소리 지름에 시끄러웠고, 오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어깨가 부딪치면 인상을 쓰기도 하고, 간판만 보면서 약속 장소 찾다가 전봇대나 사람과 부딪쳐서 넘어지기도 하고, 간혹 경찰들에게 불심 검문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날마다 시골 5일 장터 같았지만 그 시대의 유행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겐 추억을, 시민들에겐 꿈과 희망 그리고 즐거움을 주던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거리는 차분하면서 질서가 있고 시민들보다 외국 사람이 많으며 한국말보다 외국말이 많이 들렸고 상인들은 시민들보다 외국인에게 관심을 갖고 열심히 영업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명동이 아니라 외국인의 명동으로 보였다. 아쉽기는 했지만 어쩌면 글로벌 시대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명동은 더 이상 우리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오늘 추억을 되살리고 느끼며 생활에 활력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되살리고 느끼는 것보다 너무 늦게 온 나 자신이 미웠다. 왜냐하면 내가 추억을 생각하기엔 지금의 명동이 너무 많이 와버렸다. 40년이란 세월을 외면해놓고 지금 와서 구애를 하니 받아줄 일이 있겠는가?  허허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하면서 거리가 낯설었다. 명동과 추억이 매치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추억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가끔씩 기억하거나 찾아와서 충전 또는 세월의 흐름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에야 새삼 깨달았다.


 상인을 제외하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나 같은 칠순 바라보기는 보이지 않았다. 추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렸다.



작가의 이전글 은퇴 후"관계 맺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