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남아도 괜찮아

장기근속자의 고뇌

by 눈썹달

함께 일하는 나의 뮤즈 K가 말했다.

"저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둘 다 나이가 있다 보니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어서 차장님께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그래서 요즘 마음이 붕뜨고 일이 잘 안 된다고 했다. 알지. 그 연애감정.(이제는 어렴풋해졌지만)


진심으로 축하했다. 어쩐지 요즘 얼굴이 참 좋아 보이더라니.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설레고 기쁜 일이다. 그런 사람을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짙어질 무렵 나타나 주어서 고맙고 행복한 듯 보였다. 발그레한 K의 얼굴이 마치 새신부 같아서 결혼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본가가 제주도이고 강남에서 직장 다니며 독립생활 중이라고 했다. 제주살이가 도시인들에게 로망이 된 요즘이라, 우스갯소리로 K에게 결혼하고 제주도 가서 살게 되는 거 아니야? 결혼한다고 회사 그만둘 거 아니죠? 했는데, K가 웃기만 했다. 아니라고 하지 않고 그만둘 거라고 하지도 않았다. 농담의 탈을 쓴 내 진짜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그런 K의 애매한 웃음에 난 불안해지고 말았다.




헤아려보니 함께 일한 지도 어느새 10년이었다. 늘 중심을 잘 잡고 든든하게 버텨준 K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었다. 더 오래 의지하며 같이 일할 수 있길 바랐는데 언제고 떠나겠구나, 곧 그 상황이 다가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과 함께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조직에서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은 흔하디 흔한 일이지만 K가 떠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그의 빈자리는 나와 팀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고 업무 상 어쩔 수 없이 내 직장생활은 피폐해질 게 불을 보듯 훤했다. 나이 먹은 내가 후배들보다 오래 남아 존버 하는 건 정말 피하고 싶다. 내가 먼저 퇴사할 것이라는 예상이 깨지고 순서를 역전당할까 봐 불안했다. 늘 '내가 먼저, 좋을 때에 좋은 모습으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현실에 발이 묶여있다. 싫어도 지금은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 가지처럼 뻗어 나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마음이 무겁고 힘들어졌다.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혼자였고, 일하느라 마음고생 몸고생 하는 초라한 내 모습이 소설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마음이 가라앉을 때마다 찾아오는 정해진 질문이다. 항상 답도 정해져 있다. 생각해봤자 도돌이표 붙은 악보 마디 또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뱅뱅 돌기만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모르는 척, 일렁이는 우울감에 마음을 실었다. 오래가지 않을 기분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우울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전과 다름없는 결론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


과거의 나도 나이고, 현재의 나도 나이며, 미래의 나도 나다.

다만 과거의 나는 과거일 뿐이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희망하는 모습일 뿐 아직 내가 아니다. 오직 지금 존재하는 모습의 내가 진짜 나다. 현재의 진짜 나를 자꾸 과거의 나 또는 미래의 나에 견주어 그 가치를 훼손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과 상황만 쳐다보면서 열심히 지내고 있는 나를 깎아내린다.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되지 않는 고약한 버릇이다.




후배들보다 오래 회사 다닌다고 부끄러울 일이 무어에 있을까. 단지 그것이 내가 바라는 내 미래의 모습에 위배되어서 싫고, 그로 인한 실망과 우울감이 현재의 나를 초라한 모습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었다. 시각을 바꿔서 운도 실력이라는 말에 비추어보면 뻔뻔하지만 나는 실력자다.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수차례 지나도록 여전히 내 자리가 있는 것은 어찌 되었건 내가 그들에게 인정받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부족해도 아직은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필요하지 않다면 회사가 나에게 먼저 이별을 고할 테지. 나는 좀 더 있어도 괜찮은 사람인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나에게 최악의 상황이 온대도 부딪히는 수밖에 없으니 조금 덜 피폐해지도록 나를 겁먹게 만드는 부분을 채워나가면 된다. 월급 루팡이 되지 않게 주어진 내 할 일 잘하면 되는 것이다.


쓰다 보니 헛웃음이 났다. K는 멀쩡히 근무하고 있고,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는 소식만 전했을 뿐인데 내 속이 이리도 롤러코스터를 타다니. 누군가의 한마디에 불필요한 감정 노동을 자초한 것이야말로 내가 정작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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