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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Jul 08. 2021

그녀의 당당함에 지기 싫었다.

출근길, 나는 지하철 끝쪽 자리에 앉아서 가고 있었다. 누군가 내쪽으로 매달리듯 몸을 기울였다. 등 뒤로 맨 가방을 앉아있는 내 머리맡까지 들이밀고, 아래로는 내 발을 건드렸다. 그렇게 힘들게 서 있는 자신을 봐달라는 듯, 자리 좀 비켜달라는 듯. 서있는 사람이 많긴 했지만, 똑바로 서서 가기 힘들 만큼은 아니었다. 무언이지만 무언이 아닌, 입으로 하는 말 대신 몸으로 하는 강요. 그렇게 중년의 아주머니는 내 앞에 불청객으로 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냉큼 일어나 양보해야 했겠지...


하지만 버릇없게도 양보하기 싫었다. 양보를 하기 힘든 시작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나도 어렵게 착석한 자리였고, 아직 갈길이 멀었다. 어쩌면 그 분보다 내가 더 에너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헌납하듯 뺏기기 싫었다. 그 기세에 지기 싫어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럴수록 더 신경이 쓰였다. 그 아주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내 미간이 약간씩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책을 보고 있었지만 글이 아니라 아주머니를 읽게 되었다. 그녀는 옆으로 서서 내쪽으로 기울듯이 하며 한 번씩 발을 툭툭 치고, 가방을 더 내 머리 앞으로 들이댔다. 너무 거슬리고 불편했는데 그렇다고 항복하듯 일어나기도 싫었다. 이미 그 상태로 몇 정거장 지나와버렸으니 나는 그녀에게 뻔뻔하고 괘씸한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양보한다 해도 고맙단 소리 듣긴 그른 상황이었다.



어른이라고, 자리를 내어놓으라는 식의 태도를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 혼자 갈등하며 고집스럽고 꿋꿋하게 앉아있는 사이, 옆자리 승객이 내리면서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았으니 편히 가실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내 옆에서 다음 정류장이 어디인지 안내판을 보려고 온몸을 다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자리가 나서 일단 앉았는데 내려야 할 역이 얼마나 남은 상황인지 모르시는 것 같았다. 내려야 할 역 이름만 알고 계셨다. 나는 여전히 아주머니를 읽고 있었지만 참견하기 싫어서 계속 책에다 눈을 두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ooo역이 많이 남았냐고 소란스럽게 묻고는 곧 내려야 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내릴 역에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준비자세로 앉아있다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요이땅! 하듯 앞에 서있던 사람들 사이를 비집으며 바삐 내렸다. 조금만 미리 문 앞에 나가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붐비는 시간에 백팩까지 야무지게 메고 나오신 것을 보면 그녀도 나처럼 출근하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같은 출근길일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에게 당당했던 그녀와, 그녀를 인식한 순간부터 어른 공경이라는 예의와 도덕의 문턱에서 갈등했던 나의 출근길은 달랐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양보할 걸... 하는 후회도 들지 않았다. '강요' 당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인 것 같다. 가끔 이렇게 불쑥 그리고 짧게 일상에 연기를 뿜고 사라지는 타인이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 그러려니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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