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썹달 Jul 23. 2021

주부이고 싶지 않은 직장인 주부


"퍽!"

주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내 점심 도시락을 싸신 후 냉장고 정리하던 중에, 큰 유리 반찬통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 것이다. 딱 출근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 상황을 연로하신 어머니가 수습하도록 둘 수 없었다. 하필 담겨있던 반찬이 장아찌여서 간장과 유리조각이 주방 바닥으로 튀어져 나갔고, 그 파편이 어디까지 날아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천진하게 주방을 드나드는 여린 발들에 상처라도 날까 불안해졌다. 내 손과 눈으로 그것들을 클리어해야만 안심될 것 같아, 나는 팀장님께 상황을 언급하며 1시간 정도 늦게 출근할 것 같다고 보고 드렸다. 다치지는 않았냐며 잘 치우고 천천히 나오라고 답을 주셨고, 나는 팔 걷어붙이고 두 번 세 번 마음이 편해질 만큼 주방 바닥을 훑어낸 후 출근했다. 



그때만 해도 그게 문제라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출근 후 청소와 관련된 업무 처리건이 있어 보고한 후 받은 회신을 보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부의 의견대로 보고 드리고 컨펌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말로 듣긴 했었다. 의견을 구할 때 자신은 그런 쪽을 잘 모르니 여자가 보기에 또는 주부의 시각으로 잘 검토해서 의견 주면 보고 하겠다는 식. 여자, 주부, 언니 같은 단어들을 업무 중에 들을 때면 거북함에 귓구멍이 까슬거렸다. 집에서는 주부 역할, 성별로는 여자인 내가 직원으로서 업무 의견을 낼 때는 사안에 따라 응당 그것들이 반영되게 마련인데 왜 굳이 말을 덧붙이며 강조하는 것일까. 오늘은 심지어 귀에서만 왱왱거리던 단어가 업무 메일에 '명기'되어 있었다. 썩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사에서 내 이름과 직급이 아닌 주부로 칭해지는 게 불쾌했다. 그렇게 전통적 사고를 가진 상사에게 나는 오늘 주부인 티를 팍팍 낸 꼴이었다. 차라리 늦잠 잤다고 말했어야 했다. 유리 반찬통이 깨져서 주방 바닥 수습한다느니 어쩌느니 구구절절했다. 팀장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팀장님의 그 전통적인 사고를 통해서 나름 배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을 돌봐야 하는 주부라고 이런저런 편의를 봐줄 때면 고마웠다. 사실 아침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게 된 것도, 그간 소소한 배려들에 익숙해서 으레 내 사정을 이해해 줄 거란 믿음을 가진 탓이었고, 잘 치우고 천천히 오라는 말에 감사함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하니 나도 나 편하고 싶을 땐 주부를 앞세운 배려를 그저 달게 받고, 주부 역할을 업무에 요구받을 때는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모순되고 이중적인 모습이 아닌가. 회사 업무에서 주부 운운하는 한결같은 상사만큼,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려는 나도 잘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무렵 팀장님의 한마디가 꽂힌다.  


"많이 남았어? 얼른 들어가~ 유리가 깨졌었다며... 혹시 남은 유리 없는지 살펴봐야지. 얼른 퇴근해."


정말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비꼬는 말인지 헷갈렸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자꾸 후자인 것만 같았고 나의 퇴근길은 자괴감으로 물들었다. 생각할수록 오늘 일은 내가 자초한 것 같다. 유리에 찔린 발은 없었다. 찔린 내 마음이 있었을 뿐.

매거진의 이전글 너와 나는 다르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