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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Aug 12. 2021

엄마와 나의 시어머니

어머님의 도시락에서 할머니를 추억하다

1년 하고도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바이러스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는 아침마다 나와 남편의 점심 도시락을 챙겨주고 계신다. 4~5가지 반찬에, 아침에 지은 밥으로 늘 깔끔하게 싸주시고, 랜덤으로 과일 후식, 겨울엔 국도 끓여서 넣어주신다.


연세가 드시면서 미각이 많이 둔해지셨다. 대체로 반찬이 짜지만 어쩔 수 없다. 맛은 있으니까 밥과 골고루 잔반 없이 다 먹고, 주 1회 정도는 포장음식으로 대신하여 아침에 어머님 쉬게 해 드리고 나도 손 가볍게 출퇴근한다.



오늘도 그런 점심 도시락 중 하나였다.

흰쌀밥과 오징어 뭇국, 세 가지 집 반찬, 그리고 후식으로 잔잔한 청귤이 들어있었다.

갓김치가 가지런히 썰어져 들어있고 다른 반찬들도 적당한 양이었다. 보통 콩이나 보리, 좁쌀 등을 섞어 잡곡밥을 하시는데 오늘은 오징어 뭇국이라서 흰쌀밥을 지으셨나 보다.


오늘따라 유난히 밥 먹는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함께 살아온 10년의 세월 동안, 지금보다 젊으셨을 때나 지금이나, 당신 의무와 책임의 영역에 대해서는 소홀함이 없으시다.


시간 개념이 흐려져 아이들의 밥때와 간식 때를 혼동하기도 하고, 기력이 약해 지시기는 했지만, 체력이 많이 드는 청소일을 빼고는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빨래 돌려서 건조기에다 말리고, 식구 별로 구분해 개어놓고, 아이들 챙겨 먹이고 반찬 만들고 주방 정리까지 싹 해놓으신다. 


손만 야무진 게 아니라 입도 야무지셔서 티브이 앞에서 기세 등등하게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하고, 전화 통화하는 목소리 들으면 81세 노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목소리에 에너지가 있으시다. 음식 솜씨도 좋으셔서 다양한 음식을 맛있게 하시니 입맛 까다로운 손주들이 멋모르고 호강한다.


딸아이는 한식 입맛이라 김치찌개 한 가지, 미역국 한 가지에도 밥 한 그릇 뚝딱 먹는데, 아들은 한식도 양식도 퓨전도 아닌 그때그때 당기는 것만 찾는 VVIP 같은 입맛 소유자(그렇게 길들여진 것 같기도 하다)다 보니, 소바 해줄까? 별로요. 그럼 떡볶이 먹을래? 아니면 스파게티? 명란젓 밥에 요롷게 얹어서 주랴? 김치볶음밥은 어떠냐 아니면 떡국 먹을래?..... 애가 오케이 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서 먹고 싶다는 걸 최대한 해주신다. 중2지만 키는 초등 6학년 정도 되는 작고 마른 손주여서 더 애를 쓰신다. 음식은 정성이라는 사실을 어머니와 남편을 보면서 배운다. 배움과 동시에 나는 그 정성은 들이지 못하겠다는 확신이 내 안에서 더 강해진다. 내 자식이지만 어머니처럼은 못할 것이다. 



나의 엄마도 시어머니와 함께 살던 세월이 있었다. 나도 당시 가족 구성원이었으니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시절이다. 오늘 도시락을 먹으면서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에 계셨던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짐 같은 존재였다. 아빠의 가장 노릇에 딸려온 구성원 하나.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지 않으셨고 우리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났지만 할머니의 빈자리와 넘치던 사랑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 인간의 인생사 그 끝을 보며 느낀 안타까움이었달까.


함께 살 때 우린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종종 부모님 부부싸움의 근원이 되었고, 엄마 화의 원인이기도 했고, 실질적으로 집에 부담이기도 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종일 일하고 집에 온 엄마는 또다시 산더미 같은 집안일로 출근하기도 했다. 집에 할 일 없는 어른이 한 명 더 있었지만 엄마의 일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부모님은 바빴고 우리들은 어렸고 할머니는 게을렀다. 할머니가 부지런했던 때는 가을. 길거리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은행을 주워다가 집에서 손질을 하셨다. 온 집안에 꼬랑내가 진동했고 옷에 베일까 겁이 날 정도였다.


스트레스가 목에 찬 엄마는 한 번씩 폭발했다. 하루 종일 집에 계시면서 집안일 좀 거들어주면 어디 덧나느냐고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참지 않던 엄마를 백번이고 이해한다. 나도 오랜 세월 살아보니 어떤 부분에선 정말 참아지지 않더라. 



엄마보다 내가 복이 조금 더 있다면,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시어머니를 만났다는 것이다.

엄마가 내게 툭하면 시어머니께 감사하라고, 어머니 없었으면 어떻게 여태껏 직장 다니면서 애들 키웠겠냐 하시는 이유를 안다. 엄마에게는 그런 시어머니가 없어서, 평상시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자기들 엄마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갑자기 벌떼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며 엄마를 들들 볶아대던 시누이들만 많아서, 그렇게 삶이 고단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홀로 견뎌야 했기에... 그런 걱정만큼은 없게 해주는 어머니이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이쁘게 보라고 하실 수밖에.


사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시기 전으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때 어머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던 대로 따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우린 어떤 모습이었을까. 

불쑥불쑥 드리우는 현실적 답답함과 불안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었다.


엄마 말씀 그대로 그저 감사함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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