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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Apr 03. 2022

아무에게나 좋은 사람 하지 않기로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이어오면서 적을 만들지 않는 내 성향을 나름 괜찮다고 여겨왔다.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후환까지 걱정하는 쫄보 성격이어서 갈등 상황을 피하고자 그냥 담아버리고 삼켜버리고, 아차 하고 뱉었다 해도 다음을 생각해 적당히 수습해 온 결과일 뿐이었다. 내가 당한 만큼 갚아 줄 재주가 없으니 흘려보내는 편이 더 수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히면 다시 쿨하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감정을 거두고 충실하려 애썼다. 어쩌면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내 성향을 듣기 좋게 잘 포장해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최근 정말 오랜만에 정신 들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저 일상적인 업무였는데 어쩌다 서로 예민한 반응을 주고받게 되면서 나는 내상을 입고 나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회사 내 새로운 집무실 프린터기 연결선이 너무 짧았다. 팽팽하게 책상 위를 가로지르는 그 선이 업무에 불편할 것 같아 IT부에 연락해 선을 다시 조치해 주길 요청했다. 


전화를 받은 O대리는 내 용건을 들을 때부터 어딘가 탐탁지 않다는 말투였고, 그 프린터기는 자기가 설치한 게 아니라고 했다. 집무실 PC와 프린터기, 회사 계정 세팅 등은 IT부의 일이다. 요청을 받으면 그 팀 내부에서 항목 별 담당자가 나뉘겠지만 어쨌든 우리 부서에서 그쪽 부서에 요청한 사항이었고 누가 설치를 했든 간에 다시 수정을 해 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O대리는 노트북은 본인이 설치했으나 프린터기는 업체에서 설치했다고 했다. 그럼 그다음은? 그 부서에서 프린터기 업체에 수정 사항을 요청해 조치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O대리에게 어쨌든 긴 연결선으로 바꾸는 걸 알아봐 달라고 했다. 자네가 하지 않았어도 자네 부서의 업무이니 알아봐 달라는 뜻이었는데, 그는 황당하다는 듯 싸늘하게 "제가요?"라고 반문했다.

"네, 그럼 누가 해요? 그쪽에서 확인해 주셔야죠."라고 말하니, 그는 왜 자기가 한 일도 아닌 데 자기에게 그런 지시를 하시느냐며 나에게 따져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내 요청이 이렇게 반응할 만큼 잘못된 건가? 수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지시라니...? 일순간 직급으로 업무를 눌러 내리는 사람 취급을 당해 몹시 불쾌함과 동시에 별 생각이 다 스쳤다. 내가 알던 O대리가 아닌데 왜 이렇게 변했지? 나도 모르게 내가 진짜 지시조로 말했나? 부서가 다르다지만 언짢다고 대리가 차장에게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내가.... 만만... 한가....


당혹감과 황당함, 주변에 대한 민망함, 굴욕감이 뒤섞여 얼굴에 열이 오르고 목소리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라리 그때 연락 달라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어야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습관처럼 배어있는 상황 수습 본능이 내 기분을 무시하고 나와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지시한 게 아니었는데 지시로 들렸다면 미안하다'라고 먼저 사과를 한 것이다. 그 직원은 내가 사과하는 말을 들었지만 내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감정이 상한 채 상황이 끝났다. (결국 그 직원이 연락해 프린터기 업체 사람이 왔고 내가 만나서 정리했다.)



정말 별 일도 아닌 사항으로 불과 10여분 이내였지만, 이 일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곱씹을수록 상대가 괘씸하고 나 자신이 싫었다. 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사과를 했고, 내가 먼저 사과를 함으로써 상대에게 내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나도 잔뜩 기분이 상했는데 왜 그랬을까. 어떤 잡음도 한쪽만의 과실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내가 사과하면 상대도 사과를 할 거라는 무의식적인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보통의 경우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직원은 자신의 언행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상한 감정은 쉬이 해소되지 않고 내 마음속을 굴러다니면서 작은 생채기들을 냈다. 사람은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그에게 나는 그래도 될만한 사람이었나 보다 하는 생각과 그렇다면 평상시 나를 어떻게 생각해왔던 걸까. 업무적으로 엮일 일이 많지도 않았지만 내가 어이없는 업무 요청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어쩌다 그렇게 쉬운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평소 팀을 막론하고 아랫 직원에게 함부로 하는 걸 혐오하는 나를 마치 그런 사람처럼 대했다. 그 친구가 어디선가 뺨 맞고 짜증 난 타이밍에 내가 건드리게 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도 이해하고 좋게 넘기고 싶지 않다.  


그동안 나에게 좋지 않게 했던 사람에게도 감정을 거두고 업무적으로 친절하려 노력해왔는데 그런 나의 노력은 쌓이는 게 아니라 내 기본값으로 계속 수렴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친절과 배려가 어떤 이에게는 고마움이 아닌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진다. 기분 나빠도 삼키고 이번처럼 어이없어도 먼저 사과하는 식의 태도는 내 기본값에 초라함을 자초하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없지만 나에게 좋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 자세는 버리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O대리는 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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